인생은 게임이 아니라서 퀘스트를 깰 필요가 없다.
‘120세 시대가 온다’는 반갑지만은 않은 소식이 들릴 때쯤
한국 사회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다. 저속노화 붐을 일으킨 서울아산병원 정희원 노년내과 교수다. 정 교수에 따르면 처음 지식을 설파할 때는 ‘노화 지연(aging retardation)’이라는 의학계 용어를 사용했지만, SNS를 통해 ‘저속노화’라는 별칭이 확산되면서 이제는 자기소개를 할 때에도 저속노화 교수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저속노화는 말 그대로 노화의 속도를 느리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생활습관을 길들여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실천은 건강에 이로운 음식을 섭취할 것, 적당한 운동을 할 것, 충분한 수면을 취할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이득은 ‘급속사망’이다. 예전에 쓰인 ‘9988(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용어)’과 유의한 개념이다. 정 교수는 저속노화를 일찍 실천하면 할수록 사는 동안 별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고 무탈하게 지내다가,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이 다했을 때 큰 고통 없이 빠르게 죽을 수 있다는 이론을 알려주었다. 솔깃했다. 무병단수보다 무서운 게 유병장수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마라탕후루를 망치러 온 한국인의 구원자’처럼 등장한 정 교수는 마치 대형기획사 아이돌처럼 공격적으로 매체에 등장했다. 대형 유튜브 채널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출연했고, 그 영상들이 캡처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돌았다. 지면과 TV 인터뷰, 저서 발간, 개인 유튜브 채널을 여는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그래서 설마… 했다. 이제 개인 채널에서 ‘직접 연구개발에 참여했다’는 영양제를 팔까 싶어서. 합리적 의심을 했지만 정 교수는 영양제를 먹지 않는 사람이었었다. 비로소 나는 정 교수님 말씀에 충성하기로 했다. 영양제를 팔지 않는 온라인 닥터, 당신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내가 지킬 수 있는 저속노화 습관은 야식 먹지 않기, 흰쌀밥 대신 잡곡밥 먹기, 액상과당 줄이기, 규칙적으로 운동하기 정도이다. 가장 원하지만 어려운 것이 질 높은 수면인데, 이건 커피를 끊지 않는 한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직은 저속노화보다 카페인의 각성효과가 절실하다. 내겐 영양제보다 효과가 좋은 커피를 마실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120세까지 살 수 있다면 지금 내 나이는 30대이니, 앞으로 4분의 3을 더 살아야 한다. 물리적 시간이 이토록 긴데 왜 나는 30대가 저물면 인생에서 남는 게 '내리막길'밖에 없다고 여겼던 걸까. 그래서 대학, 취업, 결혼, 육아로 귀결되는 ‘한국인의 암묵적 인생숙제’ 중, 절반을 제출 못한 것에 대한 압박을 느꼈다. 이 숙제들은 내가 제출하지 않음, ‘미제출’ 칸을 선택한다 해도 미저리처럼 달라붙는다. 사회공통의 인식이 변화하지 않는 이상, 어딜 가나 내가 왜 숙제를 하지 않았는지, 숙제를 하지 않아도 ‘문제아’가 아님을 해명해야 되기 때문이다.
X세대 이후 한국인들은 마치 퀘스트를 깨듯이 자라왔다. ‘어떻게든 대학은 가야 할 거 아냐!’ 그래서 가면 ‘얼른 취업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서른 전에 신입이 되어야 한다’고. 결혼은 아무리 적령기가 늦춰졌대도 삼십 대 초중반에는 가야 할 것, 부부관계 유지와 애국을 위해선 아이를 낳아야 할 것.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건, 최소 19년의 육아. 육아를 하면 어쩔 수없이 2인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이때 내 삶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면, 아이의 삶에 과도하게 관여할 수 있다. 집착이라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고, 훗날 대가를 바라는 부모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게임이 아니라서 퀘스트를 깰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는 퀘스트를 깨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을 간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 않으며, 취업을 해도 누구나에게 안정적인 경제력이 제공되지 않는다. 유행가처럼 결혼은 선택인 시대며, 아이를 낳는 건 부부관계 유지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한편 아이를 잉태하는 주체는 남녀 모두이지만 나이에 대한 압박은 여성에게 더 가혹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는 옛말이 됐지만 태초에 여성의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까지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쓰였다. 2005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 김삼순은 겨우 서른이었는데, 노처녀라서 괴로워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30대 여성에 대한 노골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건 유튜브의 연애상담 채널이다. 유튜버가 “남자가 어린 여자를 선호하는 건 생물학적 섭리입니다!” “30대 여성분들, 제발 눈을 낮춰서 결혼하시라”라고 주장하면, 댓글에서 나이만으로 여성을 폄하하는 용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마감세일’, ‘상폐각’, ‘악성재고’ 등으로 비유한다. 이를 누군가 지적하면 ‘아줌마!’라는 대댓글을 달아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가임 능력에 따라 여성을 비하하는 게 혐오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정작 난임 가정의 실태를 알고 있을까. 2023년 보건복지부 조사 기준, 여성 난임 진단자는 15.3만 명, 남성은 8.8만 명이었다. 비율로 따지면 2:1 정도. 즉 난임 원인이 오롯이 여성에게 있지 않지만, 난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은 여성의 결함이다. 이런 선입견을 타개하지 않는 이상, 뭇 여성들이 나이를 말하기 꺼려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이와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붙으려면 ‘나잇값을 못했을 때’에나 성립되지, 30대에 결혼과 육아란 숙제를 치르지 않았다고 해서 창피해할 순 없는 것이다.
어쩌면 저속노화보다 중요한 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악속을 타파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렌틸콩을 매끼 챙겨 먹는 것보다 이로울 수 있다. 정신이 맑아야 육체도 건강할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1급 발암물질인 술 한 잔을 하며, 이런 건배사를 해보고 싶다.
우리 모두
“급속사망을 위하여!”
인생숙제에서 해방됩시다.
“Quest Ex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