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편리하지만 편한 도시가 아니게 되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1960년대에 시작된 산업화는 이촌향도를 일으켰고, 서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서울시민 천만시대는 32년간 유지되었다. 아성이 무너뜨린 건 전염병. 코로나19가 터진 2020년부터 서울 인구는 900만 대가 되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로선 체감할 수 없는 수준이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웃을 만난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지하철 역사로 내려가면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눈이 마주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본다.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 노선은 시끄럽기로 악명 높은 5호선이다. 노이즈 캔슬링을 뚫는 소음은 출퇴근만으로 체력을 소진하게 만든다. 그럴 때는 9호선이나 7호선 라인에서 사는 게 어디냐며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고통을 위로로 삼는다.
3년간의 팬데믹은 서울의 가두상권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하는 가게들이 늘어났다. 동네나 인근 상권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한 수도권 인구는 자연스레 가두상권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평일주말 할 것 없이 웨이팅 시스템 없이는 밥 한 끼를 먹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그마저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오픈 런’이 필수다.
처음에는 이것도 경험이라며 신기해했다. ‘사람이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마케팅의 승리라고 한들 ‘특별하니까 인기가 많겠지’하며 기꺼이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두 번 사용하고 삭제하던 웨이팅 어플을 기본 앱처럼 깔아 둘 상황이 오자, 내 고향 서울은 더 이상 편리하지만 편한 도시가 아니게 되었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인구 밀집은 연대보다 적대를 먼저 배우는 경쟁사회를 구축했다. 마주치는 눈이 한 둘이 아니니 외형과 유행에도 민감해졌다. 이 유행은 하이브랜드 의류나 명품잡화 따위에서 그치지 않았다. <브랜드 피라미드>를 생성하기에 이르렀다. 옷, 가방, 전자기기와 같은 소비재는 낮은 층. 중간층은 자동차라고 보았다. 이와 관련해 ‘하차감’이라는 신조어를 들었을 때, 굉장히 순진했던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차감? 내릴 때 기능이 있는 거야? 계단이라도 내려오나?” 라고 물어보니 상대의 웃음을 터졌다.
하차감이란 건 차량에서 내릴 때, 자동차 브랜드로 느끼는 자부심을 뜻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브랜드에 자아의탁을 하는 걸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브랜드 피라미드의 꼭대기 층은 무엇일까? 부동산 불패신화가 낳은 최종 보스, 아파트다. 철근 좀 빼먹은 것 가지고는 아파트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았다.
최근 SNS에서 신축아파트 입주 축제를 본 적이 있다. 이제는 안 하는 단지가 없다는 점등식은 기본, 유명 가수들을 초대한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여의도도 아닌데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못할 일은 아니지만 규정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느껴졌다. 2023년에 본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는 대지진 후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서울이 배경이다.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단 하나, 황궁아파트만 기적같이 살아남았다. 소문을 들은 외부 생존자들이 아파트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위험을 감지한 입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하나가 된다. 새로운 주민 대표를 중심으로 외부인 배척에 나서게 된다. 여기서부터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영화는 재난을 통해 집단주의의 폐해를 드러낸다. 공통에 반하는 소수 의견은 주민 안전에 방해요소가 돼버리고 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집값을 운운하는 인물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가 상징하는 바를 나타내기도 했다. 평생 모은 돈으로 샀든 은행 돈으로 영끌을 했든, 아파트라는 건 목숨만큼이나 귀한 것이었다. 이를 부추기는 시공사들은 힐, 파크, 캐슬, 팰리스 등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를 붙여 고급화를 시도했다. 브랜드 가치가 높아질수록 집주인들의 소속감은 높아져갔다.
한국인 DNA에 뿌리 박힌 집단주의는 능력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일하지 않아도 재산이 불어나는 계층과, 평생 일해도 가난한 자로 남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분노는 아래로만 흘렀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사는 건 노력이 부족해서야.”
그렇기 때문에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25년, 한국은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다. 몇 개월 앞둔 시점에서 ‘국민 절반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빠져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중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는 비율은 30대가 가장 높았다. 생산성에 피크를 찍어야 할 연령대가 삶의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뿐 만이랴. 2023년, 10대의 자살률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도시보다 늙어가는 도시가 무섭다는 이유로, 출생률 대책만 쏟아지고 있다. 그 어디에도 산 사람에 대한 대책은 거론되지 않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정말 아이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미래의 대들보가 될 수 있을까. 모두 건강한 어른이 되어 고령층을 떠받들 거라는 기대는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어느덧 한강의 기적의 단맛보다는 쓴맛을 보며 자라온 세대가 기성층이 돼가고 있다. ‘잘 살아보세’ 운동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궜지만 울분이라는 후유증을 낳았다. 2020년대의 ‘좀 낳아보세’ 운동 또한 부작용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까지 대비하고 있는 건지 묻고 싶다.
나는 사람이 많은 도시이기 전, 맑은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한동안 장맛비가 내려야 할 수도 있다. 비가 내려야 구정물이 씻긴 도시에서 생명력이 피어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