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행복은 인풋이 아니라 아웃풋이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가곡 - 봄이 오면
봄이 오면 피어난다고 하지만… 긴 겨울, 긴긴밤을 버텼는데도 차도가 없어서. 여전히 땅 속 같아서. 세상과 내 마음에 온도차가 커서. 봄이 오면 움츠러들었다. 전기장판을 깔고 극세사 이불까지 덮는 인간과 달리, 맨몸으로 추위를 견딘 꽃은 때가 되면 군 말없이 일어났다. 화단을 지나가며 생각했다. 언제나 흔들리는 건 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봄.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겨우내 하얗게 질린 얼굴들에게서 불그스름 생기가 돌았다. 거울을 보니 핏기가 돌지 않는 나는 올해도 저녁형 인간처럼 늦은 출발을 할 것 같았다. 나날이 쨍쨍해지는 햇빛과 기온의 변화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벚꽃마저 아침잠 없는 노인처럼 이르게 기상했다.
2023년 봄, 19년을 함께 산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낯선 이를 봐도 짖을 줄 모르던 겁 많던 강아지는 독립하던 날만큼은 용맹했다. 발화가 시작된 화로가 무섭다며 눈을 뜨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겨준 두 눈 고이 감고 타오름으로 향했다. 40분 뒤, 재가 되어 돌아온 나의 강아지. 강아지에게 꽃을 보여주고 싶었다. 투병 기간이 길어 좋아하던 산책을 못했으니, 봄 냄새도 맡게 해주고 싶었다.
집에서 가까운 벚꽃명소는 안양천. 조그만 호두나무 유골함을 챙겨 밖을 나섰다. 바람이 봄바람답지 않게 소슬해 유골함을 더 세게 품에 안았다.
안양천 벚나무들은 4월 초인데 벌써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간 네들이 빨리 깨웠으니, 우리도 빨리 갈 수밖에 없다는 듯’ 바지런히 몸을 털고 있었다. 발밑으로 흙냄새가 강하게 퍼졌다. 강아지가 살아있었다면 땅에 코를 박았을 것이다. 신이 나서 킁킁대며 꼬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단발머리 모양 귀 털이 바람에 나부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다. 마음속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골함을 땅에 내려두었다.
자, 봄 냄새를 어서 맡아보라고.
얼마 후 꽃잎 하나가 유골함 위로 떨어졌다. 사뿐히 내려앉았다. 하나둘, 유골함 주변으로도 분홍빛을 띤 흰색 꽃잎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벚꽃이 투신 중이었다. 기약 없이 시작된 벚꽃 장례식. 사람들이 환호했다. 장례를 기념하기 위해 급히 사진을 찍었다. 꽃비를 맞으며 빙그르르 돌거나, 양손에 꽃잎을 담았다가 공중에 뿌리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가시거리로 보이는 인파 모두 분주했다. 그중에서 어떤 한 사람의 음성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아, 행복해!”
너무 좋아,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대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그는 아마도 연인일 사람이 촬영한 사진을 확인하며 연신 캐득거렸다. 도통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얼굴을 보니, 그가 뱉은 말 그대로 행복해 보였다. 나로서는 아무리 입술을 달싹여도 나오지 않는 그 말.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행복이라는 단어에만 실어증이 걸린 듯 뱉어지지 않았다. 내게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말할 수가 있나. 행복하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말하는 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행복의 강도와 크기를 중시하여 기준이 높았을 수도 있다. 오케스트라의 큰북처럼 울림과 여운이 오래갈 만한 행복이 오기를 바라왔다.
그래서 기대했던 일들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갈 때마다, 내 팔자는 뱁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겠거니.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비관했다. 뱁새로서 만족하며 즐겁게 나는 법을 알려고 하지 않고 황새가 되기를 꿈꿨다.
TV 예능을 통해 스무 해 넘게 행복을 연구한 사람을 만났다. 연세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는 행복은 ‘큰 사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작은 순간들이 많은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즉 행복은 즐거움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이었다.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별거 아닌 기쁨’을 얼마나 자주 느끼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마음가짐을 달리 가지는 정도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한다. 내 기분을 왜곡하면서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쾌감 전구가 켜져야 하는데, 심리학계 연구 결과 인간의 쾌감을 일으키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극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 타인과의 교감 속에서 호모사피엔스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오프라인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SNS,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교감을 원하기도 한다. 같은 감정, 동질감을 느끼려고 한다.
글을 쓰려고 했던 이유를 되돌아보았다. 나 홀로 보고 마는 일기를 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기 쓰기는 초등학생 이후로 한 해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에세이를 통해 가상의 독자를 만날 상상을 할 때는 이 세계에 숱한 ‘게으른 완벽주의자’ 중 한 사람인 나도 글을 완성시키고 싶었다. 완결을 내고 싶었다. 활자를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있었다. 내가 직접 움직여 찾아가는 것. 독자든 누구든 내게 오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영영 망부석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행복은 인풋이 아니라 아웃풋이었다. 내 안의 불씨를 일으키고, 수술과 암술처럼 교감해 꽃을 피우고, 순간순간 행복함을 느낄 줄 아는 것까지……. 이것이 하나의 행복이 완성되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