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그릇에 설움을 빠뜨린다. 뜨거운 국물에 설움이 녹는다.
내가 태어나기 1년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진으로만 본 외할아버지는 매일같이 반주를 드셨다고 한다. 부정할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 그에게는 다섯 딸들이 있었는데, 이중 2명이 아세트알데히드와 친숙한 유전자를 받았다. 그 둘은 한때 술을 마시면 우리 집을 부수던 둘째 이모와 내 엄마였다.
엄마는 자기 남편, 그리고 나의 추레한 아비 때문에 몹시 괴로울 때 술에 기댔다. 외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엄마는 술을 잘 마셨지만 그런다고 술에 취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남들보다 많이 마시고 취했기 때문에 더 크게 이성을 잃는다. 제어능력이 떨어지고 사리분별을 못하게 된다. 쓰러져있는 엄마, 횡설수설 아이가 된 듯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엄마를 집에 데려와 눕히고 재우는 건 내 몫이었다.
엄마가 술을 마시는 날은 내가 밤을 새야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휴대폰이 나오기 전 시절부터 스마트폰 보급 초기 시절까지, 긴 세월 홧병을 술로 풀었다. 술을 마시면 엄마는 연락두절.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만 연락이 안 되는 게 아니었다. 휴대폰이 있어도 수신음만 울리다 끊기기 일쑤였다. 한번 자면 누가 잡아가도 모르게 깊은 잠을 자는 동생은 태평하게 자고 있고, 나는 홀로 동네 어귀를 돌며 엄마를 찾았다.
한파에 몸을 떨며 엄마를 찾아 나선 날, 아무리 찾아보아도 길가에 사람 하나 없었다. 그때 나는 집에서 2시간 떨어진 노원구에 사는 넷째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거기까지 갔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 연락을 했다.
“이모, 혹시 엄마 거기 있어?”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만 돌아다니고 이모 집으로 와.”
나는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은 새벽에 택시를 탄 학생을 수상한 눈길로 쳐다보았지만 “엄마한테 급한 일이 있어요. 빨리 가주세요.”라는 말에 가속을 밟기 시작했다. 이모 집에 간다고 해결될 일은 없지만 무턱대고 택시를 탄 건, 외로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 무렵은 아빠가 도박에 이어 바람까지 난 시절이었다. 심증은 있대도 물증을 잡지 못하던 시기, 아빠의 외도 현장을 발견한 사람은 나다. 집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 1층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두 사람. 겁이 없다기보다는 겁을 낼 필요조차 못 느꼈을 것이다. 간통죄가 존재하던 시기였지만 현장 증거로 쓰기에 밥 먹는 장면은 미약했다. 그후 내연녀가 식당 위 오피스텔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엄마와 나는 자료수집에 나섰다. 주차장에 있는 아빠의 렌트카를 촬영하고 내연녀가 사는 호수를 알아냈다. 그리고 불륜은 너무 뻔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연녀는 자살했다. 죽은 사람의 속을 내가 어떻게 전부 이해할 수 있겠느냐만 정황상으로는 죄책에 시달려서는 아니었다. 아빠가 엄마와 얘기를 하고 온다는 걸 내연녀가 가지 말라고 붙잡았던 날이 있었다. 내연녀는 자신이 부탁이 들어지지 않자, 본처를 택한 것이라고 상심해 오피스텔에서 투신했다. 30대에 인생을 막 내렸다.
나는 이따금 그 오피스텔을 지나간다. 동네여서 피하기가 어렵다. 공간을 지나갈 때에 내연녀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겨울나무처럼 비쩍 마른 몸에 은테 안경을 쓴 단발머리 여자. 그에게 가끔 묻기도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고. 감정에 잠식돼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일 때는 이 남자만이 날 구원해줄 것 같지만, 그건 사실 내가 만들어낸 허상 아니냐고. 이런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서요? 글쎄요. 바람난 불륜남이 뭐 그리 믿음직해보였나요. 당신이 사랑했던 유부남의 자식인 나는, 이제 다 늙은 그가 아프다고 해서 힘드네요. 오히려 일찍 떠난 당신이 홀가분할 수 있겠다며 명복을 빌었다.
내연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여 뒤, 2007년 5월 5일. 열아홉이었던 나는 이미 어린이는 아니었지만, 그날이 마지막 어린이날같이 느껴졌다. 햇볕이 유난히 쨍쨍하고 하늘이 맑았던 날이다. 전날 술을 마시고 집을 나갔던 엄마는 아침까지 귀가하지 않았다. 오전 11시가 지날 무렵,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인간의 촉이란 건 샤머니즘보다 용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손발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만취한 엄마는 자살시도를 했고 실패했다. 이제는 성인이면 대부분 아는 상식이 돼버렸지만 인간은 수면제만으로 죽지 않는다. 차라리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을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울 뿐. 목숨 줄을 끊지는 못한다. 위세척을 하면 검은색 구토가 나온다. 출혈 때문이라고 한다. 적혈구에는 위액의 작용을 받으면 검은색으로 변하는 철분이 포함돼있다고 한다. 미역처럼 생긴 검은색 토사물을 엄마는 끊임없이 쏟아냈다.
그렇게 두 여자가 자살을 시도했고 그중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았다.
그들을 생사를 바라본 어린 여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약물은 안 되겠다. 투신이 낫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유년시절, 나는 나보다 불행한 엄마 앞에서 힘든 티를 낼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본인 일을 가장 힘들게 느껴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으니 아픔을 억눌러야하는 법을 배웠다. 이에 대한 후유증은 서른이 넘어 나타났다. 어렸을 때는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면 거기에 만족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라는 걸 체감되는 나이가 되어보니 오히려 섧었다. 아빠도 아빠지만 엄마도 그러면 안 됐었다고. 엄마도 부모가 처음이라 뭘 몰랐겠지만 자식인 내 인생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돌이킬 수 없는데 말이다.
그럴 때마다 감정을 다스렸던 방법은 엄마를 내 엄마가 아니라, 한 여자 그리고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덟 살에 엄마(내게는 외할머니)를 여의고 큰 오빠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컸던 엄마. 또래인 조카들은 계란 프라이를 먹고 엄마는 주방에서 그걸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올케언니 눈치를 보느라 설거지도 빨래도 아주 열심히 했다. 대학은 먼 꿈일 뿐이었고 이십대에 경리로 일하다가 한 남자를 만난다. 사랑이 평생 이어질 줄 알았지만 에로스는 유통기한이 짧았다. 남자의 배신으로 외로웠고 남자가 치는 사고들로 괴로웠다.
그 와중에도 엄마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자식이 밥을 굶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남의 집 가사도우미를 하는 동안 완전히 망가져버린 손으로, 박카스병 하나도 제대로 따지 못하는 손으로, 여태껏 도마를 깔고 칼질을 하며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사람. 그 음식을 먹고 자란 나는 국그릇에 설움을 빠뜨린다. 뜨거운 국물에 설움이 녹는다. 훌훌 흔적 없이 사라진다. 설움이 첨가돼 짭짤한 국을 마시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엄마처럼 살 수 있겠냐고.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답이 나오기 전까지… 아마도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