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무기가 없던 아이는 냉소를 방패로 삼기로 했다.
1989년, 겨울을 이틀 앞두고 태어났다. 내 위로 오빠가 있었지만 유산이 되면서 장녀가 되었다. 주민등록초본을 떼면 주소지가 한 페이지를 넘는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 여기저기서 더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인생 최초의 기억은 네 살배기 무렵, 서울 은평구에서 살 때였다. 한밤중 아빠와 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불 꺼진 단칸방에 현관 센서등이 켜지는 순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선에 뛰어든 사람은 어린 딸 둘을 둔 부부였다. 두 번째 기억은 5자매 중 첫째 이모 집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였다. 지금은 뉴타운아파트가 세워졌지만 당시에는 슬레이트 지붕들이 듬성하게 있는 그린벨트 구역이었다.
이모 집은 평지에서 25분은 올라가는 산만디기(산마루의 경상도 방언)에 위치해있었다. 잡초를 헤치고 돌을 밟아가며 올라가야했다. 엄마는 “산만디기 힘들어죽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길은 젊은 부부의 단골싸움 장소였다. 아빠가 엄마를 때려도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모!”를 외치며 내 다리만한 돌들을 밟아 올랐다. 있는 힘껏 뛰었다. 울 겨를은 없었다. 얼른 어른을 불러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두 딸이 태어난 후, 아빠는 회사에서 잘리고 남대문시장으로 갔다. 그릇 장사를 하더니, 팔아야 되는 그릇은 안 팔고 본인이 그릇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집 대신 하우스(도박장)가 친숙한 사람이 되었다. 아빠가 가정을 등한시할수록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했다.
헤어나기가 지난하다는 것. 가난과 도박의 공통점이었다.
가진 무기가 없으므로 냉소를 방패로 삼기로 했다.
① 갖지 못할 것들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므로 눈을 돌릴 것.
학교에서 친구들이 화려한 샤프나 필통을 자랑하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어차피 기능은 똑같다며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눈길이 떼어지지 않는 날에는 방과 후 팬시점에 들렀다. 한참을 구경했다.
돈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아홉 살에 알았다. 그때 초등학생 버스비가 10원이었다. 학교가 멀어서 등교를 하려면 버스를 타야했다. 그래서 학교를 가지 못했다. 집에 10원짜리 동전 하나까지 싹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집기에는 빨간 딱지들이 붙어있었다. 늘 그러하듯 사고를 친 아빠는 집을 떠났고 뒷감당은 세 모녀의 몫이었다.
어느 여름밤이었다. 사채업자들이 집에 들이닥친 날, 엄마는 나와 세 살 어린 동생을 방 안에 숨겨두고 홀로 장정들을 상대했다. 그들은 초장부터 기선제압을 한답시고 엄마를 윽박질렀다. 그런다고 없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들도 우리가 수중에 1원 한 푼도 없는 알거지인 걸 알면서도 위협을 가했을 것이다.
그날 우리를 살려준 사람은 교회 장로님이었다. 엄마는 사채업자들이 방심한 틈을 타, 장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달음에 집으로 와주신 장로님 덕분에 인명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날이 밝은 후, 세 모녀는 이미 경매로 넘어갔던 집에서 탈출했다. 여섯 살이었던 동생의 애착인형 하나도 못 챙긴 채 맨몸으로 나왔다. 이후 이모 집들을 전전하며 살았다. 서울 강서구에 반지하방 하나를 얻게 된 건 3년이 흐른 후였다. 열두 살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자살충동을 겪었던 시기였다.
아빠가 빌린 돈을 갚지 않아서 화가 난 이모가 있었다. 둘째 이모는 술을 마시면 우리 집으로 왔다. 알루미늄 섀시 문에서 쿵, 소리가 나면 내 심장도 덩달아 내려앉았다. ‘문 열어!’ ‘네들은 잠이 오냐!’ 이모에게 문을 열어주는 날은 밤을 새는 날이었다. 이모는 몇 개 있지도 않는 집기를 부수고 엄마를 할퀴고 때렸다.
형광등이 켜졌다 꺼졌다, 깜빡거렸다. 그러다 불이 켜졌을 때 이모 눈에 들어온 건 벽에 걸린 액자였다. 벽 한쪽은 내가 받은 상장으로 메워져있었다. 술에 취하면 체면 차릴 일이 없으니 이모의 본심이 나왔다.
“땡전 한 푼 없다는 것들이 액자는 뭣 하러 걸어 놔!”
“무슨 돈이 나서 액자를 걸어!”
② 가난하면 잘한 것도 칭찬받을 수 없다. 절박한 포즈를 취하자.
양귀자 소설 「모순」에서 가난한 주인공 안진진이 말한 것처럼 최대한 절박한 포즈를 취하자고.
빚진 살림에 액자는 사치인 것이다.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닌데, 임계점에 다다랐던 어느 새벽. 나는 반지하를 뛰쳐나왔다. 뿌연 눈가로 인해 4차선 도로 위 불빛들이 쥐불놀이처럼 일렁거렸다. 과도한 각성 상태처럼 온몸에 떨림이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내 몸이 내 소유가 아닌 것처럼 붕 뜬 느낌이라, 이대로라면 차에 치인대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작가가 아니었다. 나는 글보다 음악을 그리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음악 전공이었던 담임 선생님은 가창 시험을 마친 후, 내게 예고 진학을 권했다. 특성화고가 활성화되지 않는 시절, 서울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려면 리라고나 국악고 입시를 준비해야 했다. 선생님께는 부모님과 상의해본다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꿈은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청음부터 화성학까지로 이어지는 학원비는 아르바이트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학으로 합격할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③ 애매한 재능에 비해 높은 이상만큼 괴로운 건 없다.
그래서 포기했다. ‘우리나라에 깔리고 깔린 게 노래 잘하는 사람인데, 네 실력에 무슨 노래야?’ 스스로를 비웃는 방법으로 꿈을 뭉갰다. 대신 가고 싶었던 대학의 다른 학과로 진학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기쁨의 눈물이 아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아빠가 출가했다. 그해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200ml 우유 한 팩도 못 마시던 내가,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자 식욕이 생긴 것이다. 먹고 또 먹어도 얹히지 않고 맛있다는 게 신기했다. 엄마는 “성장기 때 그렇게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5cm는 더 컸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나는 응수했다. “배곯는 고통이라도 던 게 어디냐”고. 심리적 불안이 소화기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식욕 없음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밥 먹고도 돌아서서 배고파했으면 그 식비를 어떻게 감당했으려고.
이후 10년간 아빠는 꿈속에서 나타났다. 아내를 때리는 남편으로 출연했다. 늘 비슷한 악몽을 꾸면서도 나는 적응하지 못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이건 꿈’이라고 눈을 번쩍 떠 현실을 각인시킨 후에야 깼다. 겁이 나기도 했다. 예지몽일까 봐. 우려는 현실의 전야니까. 아빠가 꿈에 나타나는 빈도가 잦아질 무렵, 불쑥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을 보고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당신은 “많이 아프다”고 얘기했다. 폐를 절반이나 잘라냈다고. 일을 할 수 없다고. 그런데 병원을 가야한다고. 그러니까… 돈이 필요하다고.
나는 냉소하고 싶었다.
내 유일한 빽이었던 냉소를 당신께 선사하고 싶었다. 나 자신과 세상이 아닌 부친을 향해. 당신은 내가 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도, 꿈을 포기했을 때도, 가장 역할을 하느라 힘에 부칠 때도 나를 한 번 돌아봐준 적이 있냐고. 싸늘하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통화가 끊길 때쯤 나는 부디 이번이 한 번이길, 이 전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바람은 종이비행기 같았다. 간절하게 날렸는데 얼마 못가서 땅에 떨어져버렸다. 어떻게 날리면 추락하지 않고 하늘까지 닿을 수 있을까. 휴대폰에 본명 세 글자로 저장된 아빠의 이름. 난데없이 액정에 그 이름이 뜨면 심장이 난기류를 만난다. 요동치거나 하강한다.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침이 마른다. 난기류를 버텨내며 생각했다. 어떻게 된 게,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