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내 곁을 지킨 팬은 ‘나를 응원해 주는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행(行)은 살 같고
열(列)은 칼 같은
면 위에
검은 잉크 가로뉘어져있다
일렬횡대로
일렬횡대로
일렬횡대로
10대의 끝자락
작고 검은 행렬에 의지해 살았다
읽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종이 위에 누워
표지를 이불 삼아 덮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자퇴를 했다. 구립도서관으로 등하교를 했다. 수험생이면서 4층 자습실은 등한시하고 3층 어문학·간행물실로 출석했다. 교과서대신 시나 소설을 읽었다. 작문 실기로 대학을 간다고 목표했기 때문에 이게 나의 참고서라고 여겼다. 또래와 함께 걷던 길에서 이탈했지만, 종내 그들과 같은 대학이란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문제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시 때까지 내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만한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 작문 실기를 통과해도 2차로 구술면접을 치러야 하는데, 말하기에 영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서 어버버만 하다가 퇴장하는 건 아닐지. 미래는 기대보다 불안이 컸다.
그 무렵 할머니와 잠시 같이 살았다. 아빠는 자기 엄마가 보는 앞에서도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무력(武力)으로 그를 제압하고 싶었지만, 성인 남성의 폭력 앞에서 무력(無力)한 존재일 뿐이었다. 표출되지 못하는 분노는 괴로움으로, 이 괴로움은 털어놓을 곳을 찾지 못해 외로움으로 반경을 넓혔다. 이 외로움 속에서, 잉태한 적 없는 자기부정이 자라났다.
내가 태어났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면 보고 싶지 않은 것들만 보였다. 눈을 감으면 이번에는 초조하다. 내가 못 본 사이에 잔혹한 일이 벌어질까 봐, 나는 가족이 모두 잠든 후에야 불을 껐다. 때를 놓쳐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잡념에 빠진다. 그 끝은 나를 미워하기. 살기 싫다면서도 갖고 싶은 게 생기고, 하고 싶은 게 여전히 있는, 욕망하는 모순적 존재가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거울 속 나를 모른 체하며 세수했다. 교복대신 트레이닝 복을 입고 도서관에 간다. 거기에서 최승자 시인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만났다. 그리고 시집의 첫 번째 시, 마지막 연에서 나는 나를 만났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일찌기 나는 中
시를 읽자마자 강렬한 통각이 느껴졌다. 몸을 관통할 만한 거센 화살에 맞은 것만 같았다. 그토록 내가 바라던 것.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다가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소문이고 싶었다. 이 비루한 마음을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단번에 시인에게 매료되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마음에 따끔히 맺히는 검은 행렬이 이어졌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내 청춘의 영원한
20대가 되면 그리움이 추가되겠구나.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 삼십 세 中
서른엔 번뇌한다. 선행학습 덕분에 서른에 의연할 수 있었다.
시인의 작품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할 염세쟁이들을 위한 한줄기 빛이었다. 자기파괴적인 문장들로 외로움의 응어리를 녹여주었다. 그래서 몸속에 한파가 들이닥쳐 장기를 휩쓸 때마다, 나는 일렬횡대 위로 쓰러졌다. 쿰쿰한 종이냄새를 맡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뺨과 면이 맞닿고, 턱이 떨릴 때쯤이면 표지를 덮었다. 누가 볼세라 가렸다. 책은 자기 몸을 젖게 만드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
내가 나인 게 싫었던 사람이 나뿐일까. 아닌 걸 알기에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차별받으며 큰 사람, 따돌림을 당한 사람,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나 자신이 미물 같아서, 각각 저마다의 사연들로 나를 증오한다. 태어남을 당했지만 존재 자체가 내 잘못인 것처럼 착각한다.
왜냐면 사지에서 가시가 돋아나는데 그 가시가 밖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이때 ‘나약해서’와 같은 오만에서 비롯된 비난을 들으면 숨어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쓰레기로 가득 찬 방을 더 좁히고 좁혀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
영화「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 또한 그랬다. 마츠코는 아픈 언니와 남동생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마츠코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남자에게 사랑받기. 마츠코는 평생 사랑받는 여자는 꿈꾼다. 사랑에 실패해도 남자를 찾고, 버림받아도 다음 남자를 찾는다. 그러다 종국에는 쓰레기 집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일은커녕 씻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시도 때도 없이 벽에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문장을 쓴다. 누구를 향한 자기반성일까. 그런 마츠코를 보며 이웃들은 미쳤다며 혀를 찬다.
영화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그저 그런 영화였을 것이다. 정신과에 다니는 마츠코는 병원에 갔다가 절친과 마주친다. 수십 년 만에 재회한 친구는 마츠코의 마지막 기회. 그는 미용기술이 있는 마츠코에게 다시 일을 해보자며 명함을 쥐어준다. 그런데 친구가 준 명함은 강가로 간다. 자격지심이 발동된 마츠코가 강가에 명함을 버렸기 때문이다. 늙고 아픈 마츠코는 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본성이 살아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행동했던 사람, 마츠코는 다시 강가로 간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명함을 찾으러 가는 마츠코. 내가 마츠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영화는 실시간 르포로 장르가 바뀐다. 마츠코는 강가에서 동네 아이들을 마주친다. 마츠코는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집에 가라’고 훈계를 한다. 그 죄로, 아이들이 갖고 놀던 야구방망이에 맞게 된다. 마츠코가 명함을 쥐고 돌아가려는 순간, 아이들은 기어코 그를 쓰러트렸다. 영화 제목인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삶’은 이렇게 막막이 내린다.
비극은 도처에 깔려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안다. 하지만 비극을 대비할 수 없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한다한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훗날 마츠코의 유품을 정리하던 조카만이 고모 마츠코에 대해 “사랑스러웠던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마츠코가 생애 간과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차별 속에서 자란 마츠코는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남자를 찾아다녔다. 마츠코 사랑의 이면은 인정 욕구였다. 인정욕을 사랑으로 포장해 갈구하고 얻어냄으로써 자기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마츠코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한 기형도 시인처럼 살았다. 늘 자신을 피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들여다보지 않았다. 외롭다면서 언제나 제 안에서 울고 있는 외로움을 진심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외로움, 외로움은 늘 인류의 난제였다. 외로움에는 반대말이 없다. 외로움의 사전적 정의를 보아도 명확치가 않아 ‘역’을 떠올려보았다. 반대를 알면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외로움에는 반대말이 없었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불쑥 생각나는 외로움의 반대말의 반대말이 외로움이 아니므로 ‘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외로움의 특성이 있다.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것. 철들지 않은 응석받이, 그래서 영원한 나의 어린애라는 것.
외로움을 포대기에 싸서 업은 나는 얘를 버릴 수도 없고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요.’ 책에게 물었다. 그때마다 문학가들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네 아이를 달래는 건 너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답은 네게 있지 않느냐고.
그래서 허무해질 때, 절망보다 희망이 더 나를 힘들 게 할 때, 타인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 느껴질 때, 나는 내 안에 어린애를 달래기 위해 여러 회유책을 써보았다. 그중에 효과가 있었던 건 내키지 않더라도 칭찬을 해주는 것이었다.
‘오늘 살아있다는 건 너를 견뎌냈다는 것’
그것만으로 오늘 할 일은 끝난 것이라고.
그러니 다독여주라고. 외롭지 않도록.
‘영원한 마왕’ 신해철도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태어남으로써 생의 의무를 다 했다”고. 우리의 삶은 선택권이 없었으므로 져야 할 책임도 없고, 특별히 완수해야 할 임무도 없다. 그러므로 나를 대상화할 때는 비평가보다는 애호가가 되기를.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믿고 의지할 수 있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자신을 긍지로 삼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이 마음을 간직하려고 한다. 죽는 날까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았던 삶이라고 해도, 온갖 루머에도 떠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킨 팬이 있었다는 것을. 일평생 내 곁을 지킨 팬은 ‘나를 응원해 주는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 사실이 내게도 동류에게도 위안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