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안고도 살아간다는 것

by 또 다른세상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았다.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내 몸 안쪽 어딘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처음 진단명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날 밤 어둡운 방안에 앉아 믿지 못하겠어서 멍하게 허공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내 삶이 산산이 부서진 줄 알았다. 몇십 년 동안 한 직장에서 버텨왔던 날들, 두 아이를 키우며 달려온 세월, 그 모든 것이 눈앞에서 흩어지는 듯했다. 내가 아는 세계가 끝나고 낯선 세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나는 ‘상처를 안고도 살아간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몸으로 배워야 했다. 사람들은 상처를 극복하라, 잊어버리라, 털어버리라 말하지만, 그것은 마치 손에 난 상처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두는 것과 같다. 덮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상처는 더 깊어지고, 고여 있던 고통은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터져 나온다. 나는 그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았다. 상처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첫 주, 나는 매일 새벽마다 작은 공책을 꺼내 짧게 일기를 썼다. 부작용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일상을 무너트렸다. “오늘은 열한 번째 약을 맞았다. 입안이 헐어 음식을 삼키기 힘들다. 하지만 하늘이 너무 맑았다.” 아픈 몸으로 쓰는 그 메모들이 내게는 생존의 기록이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 문장들 사이로 삶의 의지가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상처를 기록하는 행위는 상처에 이름을 붙이는 일과도 같다. 이름이 붙여지면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은 명확한 존재가 된다.


가족들 앞에서는 여전히 ‘괜찮다’고 웃었다. 아이들이 군에 있거나 학업으로 바쁜데, 내가 더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매일 울음이 차올랐다. 그 울음을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을 때, 나는 내 상처를 안아주는 연습을 했다. 병원 대기실에서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혹은 집에 돌아와 빈방에 앉아 스스로를 토닥였다. “너는 잘하고 있어. 오늘도 여기까지 왔잖아.” 그런 말을 건네는 것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어느새 그것이 나를 붙잡아 주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다. 상처 덕분에 내가 더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예전에는 친구의 작은 고민조차 귀찮게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든 내 앞에서 힘들다고 하면 그 말의 무게가 바로 전해진다. 그 사람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웃음 뒤에 숨어 있는 그림자를 알아차릴 수 있다. 상처가 나를 단단하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부드럽게도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전, 항암을 함께 시작한 동료 환자가 치료를 끝내고 퇴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병원 복도에서 짧게 포옹을 했다. 서로의 눈빛 속에는 수많은 고통의 날들이 오갔다. 그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감사가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상처가 없었다면 이렇게 깊은 연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의 아픔과 그녀의 아픔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었다.

나는 이제 내 상처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지나온 길을 증명하는 지도와 같다. 오래된 흉터는 내 이야기를 담고 있고, 앞으로의 길을 가늠하게 해준다. 상처가 나를 규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나를 형성한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저녁이 되면 가족들이 각자의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면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오늘 하루를 떠올린다. 약을 먹으며 느낀 쓰디쓴 맛, 병원 복도에서 만난 얼굴들, 작은 친절이 주는 큰 힘.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다. 상처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내 삶 속에서 자리 잡아 하나의 풍경이 되어 간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기억, 실패했던 일, 스스로를 탓했던 순간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통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우리 삶의 결을 바꾼다. 나는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는 대신, 그것을 내 안의 가장 조용한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꽃을 심듯 글을 쓴다. 쓰는 동안 나는 상처를 돌보고, 상처는 나를 돌본다.


상처를 안고도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과 같다. “네가 겪은 일들이 너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너를 만들어 왔다. 너는 여전히 걷고 있다.” 그 목소리를 믿으며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언젠가 이 기록들이 같은 길을 걷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모두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고 있음을, 그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무언가가 있음을 전하고 싶어서다.

이제 나는 안다. 상처가 있다는 것은 불완전함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형태라는 것을. 숨 쉬고, 걷고, 사랑하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 그게 바로 ‘상처를 안고도 살아간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20250717_164003.png


월요일 연재
이전 21화내게 주어진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