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빼빼로데이. 다시 항암이 시작되었다. 다섯 시간 동안 약물이 온몸을 흐르고 난 뒤에는 몸이 몸 같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지러워 무언가를 꼭 짚어야만 안정이 됐다. 속은 울렁거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 깨도 맑아진 머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일주일 뒤, 11월 18일. 채혈을 하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바늘은 네 번이나 찔렀고, 지난번 발에서 뽑았던 기억이 손끝을 다시 조여 왔다. ‘케모포트 꼭 해야 한다’는 생각만 되뇌며 의사를 만나기만을 기다렸다.
“호중구 수치가 너무 낮습니다. 항암은 다음 주로 미룹니다. 백혈구 주사 맞고 가세요.”
의사의 말은 단호했고, 이어 케모포트 얘기에 “왜 지금까지 안 했죠?”라는 말이 더해졌다. 준비 없이 바로 수술을 진행할 거라는 설명이 이어지자 머릿속이 잠시 멈춘 듯했다.
11월 20일 아침, 수서역 근처 병원에 도착했다. 처음 본 낯선 공간에서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고 탈의실로 안내받았다. 반팔과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옷 앞에 달린 단추의 의미도 모른 채 묵묵히 지시에 따랐다.
잠시 후 수술실. 차갑고 파란 침대가 눈앞에 놓였다. 담요를 두 장 덮었는데도 긴장으로 다리가 먼저 떨렸다. 국소마취가 시작되자 서서히 칼날 같은 고통이 살을 파고들었다.
“목에 마취합니다.”
말이 끝나는 순간, 목은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잠식됐다. 아프다고 말하면 더 아픈 것 같아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불로 지지는 소리, 칼이 스치는 느낌, 호스를 삽입하는 낯선 압력이 귀와 가슴과 피부로 동시에 밀려왔다.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눈물이 귀 뒤로 흘러내렸다. 믿음이 깊지도 않았지만, 그 순간 마음속으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잘 견딜 수 있게 해 주세요. 따뜻한 손으로 다독여 주세요. 혼자가 아니게 해 주세요.’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생살을 자르고, 불로 지지고, 본드로 붙이는 이 복잡한 과정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들도 참 대단하다.
본드가 마르도록 작은 선풍기를 들고 있는 간호사의 손이 묘하게 따뜻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수술대 위의 환자는 어느새 수납을 기다리는 일상인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는 순간, 아까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병원을 나서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도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두려움에 떨었지만 해냈고, 아무도 없었지만 무사히 버텼다. 두 시간 걸려 집 앞에 도착하니 홀로 걸어온 길이 낯설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오늘은 친구가 보내준 닭갈비를 엄마와 맛있게 먹을 예정이다. 수술대에서 벌벌 떨었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건네며, 한술 크게 퍼 넣을 거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에서 건넨다.
“정말 잘했어. 오늘도 끝까지 해냈어.”
의지하고 싶던 마음에서 벗어난 하루.
두려움을 넘은 하루.
오늘의 자신에게 가장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