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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한국어 선생님

by 키나코 Mar 13. 2025

 일본에서 꽤 오랫동안 한국어를 가르쳤다. 대학시절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는데 네이티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격요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지 전혀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다. 내 찐친 말로는 사사건건 남을 가르치려 드는 내 기질 때문에 오래 간 거 아닐까 냉철하게 분석했다. (착하고 좋은 친구다.)  굉장히 크게 공감했다. 상당히 맞는 말이었다. 마흔이 넘어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좋은 영어 선생님과 그렇지 않은 선생님에 대한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언어 튜터로서 내가 얼마나 학습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는지 깨달았다. 한국어 선생님을 시작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뭐든 지식을 넣어주는 게 학생을 위한 일 같겠지만 길게 설명하고 사족을 달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영어 선생님은 달갑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못한 거 같은 허망함이 밀려왔다. 동영상 강의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듣고 싶어서 회화 수업에 돈을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것들을 총동원해서 문장을 만들고 그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무조건 많이 들어주고 자기 말을 적게 하는 선생님을 고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또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하게 쳐다보고 있는 선생님은 싫었다. 돈 주니까 앉아있는 느낌이 날로 드시는 거 같아 매우 불쾌했다. 그 차이는 미소였다. 듣는 내내 웃고 있는 선생님에게는 어쩐지 영어 문장도 잘 만들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소재가 고갈된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주는 선생님! 귀 기울여주고, 웃어주고, 질문을 잘하는 삼박자가 갖추어진 선생님이 언어 튜터로서 가장 좋은 조건인 것 같았다.


 직접 느껴버렸는데 한국어를 가르칠 때도 그렇게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과 학생을 매칭시켜 주는 새 플랫폼에 등록해서 개인 레슨을 개설했다. 카페에서 만나 회화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했다. 온라인이 쉽고 더 많은 예약을 받을 수 있겠지만 영어 배울 때 온라인보다 직접 만나 수업하는 게 훨씬 재밌었다. 그래서 한국어 수업은 오로지 대면 수업만 고집했다. 새로 만든 레슨 실적은 저조했다. 가뭄에 콩 나듯 수업 예약이 들어왔다. 그런데 리뷰와 별 평가가 쌓여가면서 어느 시점부터 인기가 폭발했다. 도쿄에서 일대일 대면 수업을 하는 사람이 흔치 않아 틈새시장이었던 요인도 있었지만 한번 내 수업에 왔던 사람들 10명 중 7명은 다시 예약을 했다. 리뷰의 힘이 컸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한국말을 많이 한 날은 처음이에요.


그룹 레슨에서 발언권을 얻기 힘들었던 사람들, 독학으로만 배우다가 진짜 한국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던 학생들, 온라인에서 문법 수업을 받았던 분들. 대부분의 일본인은 한국에 직접 유학을 가지 않는 한 이런 식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밖에 없다. 맘대로 이야기를 더 해 보라고 멍석을 깔아주는 수업은 정말 흔치 않은 형태였던 것이다. 거기다 나는 한글 키보드 치는 걸 변태같이 좋아해서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회화를 전부 타이핑해 함께 잘못된 표현은 고치고 수업 후에 메일로 보내줬다. 어색한 침묵이 생길 틈 없이 질문을 이어주고 나머지는 그냥 조용히 들었다. 정말 내 얘기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순간엔 허벅지를 찌르며 참았다. 수업 중 몇 번이나 '와! 나도 그런 적 있는데! 아.. 그럴 땐 이렇게 하면 되는데.. 후… 나 그거 보다 더 좋은 거 아는데…'라는 말을 커피와 함께 삼켰다.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에 대한 이야기인데, 기분 좋은 대화법이나 미소, 웃는 얼굴, 부드러운 경청법 등을 검색해서 공부했다. 가장 실용적인 방법으로 내가 채택한 것은 '개구리'를 묵음으로 말하고 '리'의 입모양을 그대로 고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봐도 거울 속 얼굴이 과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또 느닷없이 '리'만 하면 가식적인데 꼭 '개구리'를 다 입으로 발음해 봐야 좋은 미소가 나온다. 정말이지 이걸 생각해 낸 분, 아니 이로운 정보를 전파하는 세상의 모든 유튜버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얼마나 개개인의 삶의 질에 관여하고 있는가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다. 그래서 나도 영상 제작에는 소질이 없지만 이런 글로 내가 깨달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유해 본다.


 집에서 틈만 나면 ’ 개구리‘ 미소를 연습했다. 개설하고 3년 정도 활동한 내 수업은 이제 오픈하자마자 예약이 꽉 차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가르쳐 들려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다. 아이폰에 연결할 작은 키보드 하나 들고 간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자연스럽게 고쳐주는 일뿐이다. 매우 자주 고쳐야 하는 학생도 있지만 문법 설명을 장황하게 하지 않는다. 솔직히 일본인으로서 한국어 발음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특해서 나는 계속 칭찬을 한다. (내 자식이 한국말 좋아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마음에)

브런치 글 이미지 1


 사실 새로운 플랫폼에 한국어 레슨을 개설하기 전부터 13년간 꾸준히 개인 레슨을 하던 일본인 학생이 두 명 있었다. 그중 ‘신상’이라는 60대 여자분이 계시다. 20년째 거의 제자리걸음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셨다. 늘 하던 말만 하시고 늘 비슷한 표현만 썼었다. 그러다 내가 언어 튜터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고 변하기 시작한 즈음, 신상에게도 역시 새로운 방법을 적용했고 13년 만에 신상이 한국어 수업 중에 그렇게 눈을 초롱초롱 밝히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생각해 보니 신상이 길게 말하도록 둔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느꼈던 후회와 미안함을 떠올리면 지금도 쿵하고 무언가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그 이후로 신상의 한국어는 훨씬 다양해졌다. 더 많은 말을 시도하고 회화 속도도 빨라지고 자기 속이야기를 더 많이 하시게 돼서 습득하는 단어도 확연히 늘었다.


내가 영어공부를 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세상 모든 일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있고 쓸데없는 경험이나 배움은 단 한 개도 없구나 깊이 생각하게 되는 일이었다. 참고로 취미 삼아 보컬 트레이닝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남편이 내내 ‘왜… 보컬 과외를 … 도대체 그런 쓸데없는 걸… 왜… ’라는 얼굴로 의아해했다. 하지만 나는 출산할 때 보컬 트레이닝에서 배운 기초 호흡법을 이용해 쑴풍 순산을 했다. 간호사님과 의사 선생님의 부라보!! 정말 잘했어요!! 숨이 길고 좋아요! 그대로! 칭찬세례가 분만실 가득 울려 퍼졌었다. 뭐가 언제 어디에 쓰일지 진짜 모르지만 언젠가...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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