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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다친 이야기

by 키나코 Mar 06. 2025

10년에 한 번씩은 손을 썰고 다니는 나. 이번에도 일하다가 무가 아니라 손을 썰었다. 왠지 무를 썰면서 ‘나 이러다가 손을 다치겠는데.’ 생각한 순간 다쳤다. 옆에 있는 스무 살 아르바이트생이 사무실에서 부리나케 찾아온 반창고는 줄줄 흐르는 피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나보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들 입을 모아 조퇴하라고 배려해 줘서 택시를 탔다. 그런데 아무리 압박을 해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택시 안에서 재택근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손… 손 베었어… 너무 아파…. “

남편 케군의 첫마디는 “괜찮아? 보험 되나? 산재받을 수 있대?”였다. 내가 여자친구였다면 서운했을까? 아줌마라 그런가... 나의 반응은 ‘… 똑똑한데? 회사에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집에 와서 한 시간을 끙끙 앓다가 오후 진료가 시작되자마자 동네 피부과로 달려갔다. 여기는 내가 내성발톱을 수술한 곳이기도 했다. 피부과 선생님이지만 형성외과(形成外科)로 유명했다. 홈페이지에도 저는 형성외과에 자신 있고 정말 잘한다는 선생님의 자신만만한 소개가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 형성외과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피부과에서 하는 치료 중 먹는 약, 바르는 약 처방 말고 가끔 피부를 째고 짜고 뽑는 외과적인 치료를 일본에서는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선생님은 정말 형성외과 진료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아들 피부가 뒤집어져서 갔을 땐 무미건조하게

“네.. 그러시군요… 약 처방해 드릴게요… 받아가시고 일주일 뒤에 다시 오세요… ”

반 감긴 눈으로 자판 입력을 하셨던 걸 기억한다. 그런데 내가 내성발톱으로 갔을 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날도 피가 흥건한 손가락을 움켜쥐고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 눈이 두배로 커지며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모든 간호사를 불렀다.

여기 지혈밴드 그거 갖다주고~ 가위 좀~

빨리빨리 하라는 제스처를 동반하셨다.  

“어디다 다치셨어요?”

”업무용 슬라이스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접수창구로 이어진 작은 문을 벌컥 열고

“00 씨! 산재 처리! 부탁해요!”

보험부터 챙기셨다.

뭐랄까 왠지 생기가 돈다… 눈빛도 초롱초롱하신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다친 당일부터 하루 동안 지혈 반창고를 칭칭 감고 방망이 만한 손가락으로 지냈다. 손가락은 굉장히 예민한 부위라 다른 데보다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그날 밤 너무 아파서 검색창에 왜 밤에 아픈가요? 아침에도 아픈가요? 왜 어두워지면 아픈가요? 집요하게 물었다. 사람의 면역력은 밤부터 아침에 걸쳐 풀 가동되기 때문에 낮보다 밤이 더 아프고 열이 나는 거라는 걸 처음 알았다. 다음 날 아침이 절정으로 고통스러웠다. 몸 한 군데가 아프니까 세상 모든 전쟁 소식이 끔찍했고 사람 다치는 드라마나 영화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들은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또 고문을 당했겠구나 란 생각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병원 갔다 와서 절친인 홍이한테 전화했다.

“나 일하다 손가락 다쳤어.”

홍이가 말했다.

“알바도 산재처리 될라나?”


그놈의 보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내 주변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일관성이 있었다.




어디 다치면 된장 바르는 세대는 아니었지만 (이모들이 진지하게 그렇게 조언하던 기억은 있다.) 빨간약을 집에 두던 시절에 자란 나는 여전히 다친 손가락엔 소독약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물에 닿지 않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세게 박혀있다. 과산화수소를 뿌리면 상처부위에 부글부글 거품이 나는 걸 멍하니 쳐다보는 게 참 재미있었지.


그리고 언제부턴가 하이드로콜로이드 반창고를 쓰게 됐지만 (일명 ‘메디폼’ ) 나는 지금껏 그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한참 부족했단 걸 알게 됐다. 솔직히 어릴 때 쓰던 소독약+건식 반창고만 있어도 아쉽지 않았고 하이드로콜로이드 반창고가 미덥지 않았고 새로운 정보를 내 안에 업데이트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데 손가락을 7mm 베이고 이렇게 큰 상처를 하이드로콜로이드로 완벽히 치료하면서 나는 드디어 이 놀라운 발명품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얘는 습윤밴드라는 별칭답게 물에 닿아도 되는 방식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지혈밴드를 습윤밴드로 교체하면서 말씀하셨다.

“이제 집안일이나 샤워도 다 하셔도 돼요.”

“오… 정말이에요?”

‘젠장… 다친 다음 날 왜 그게 되는 거지?‘

표정 관리를 잘해야 했다.


다친 날엔 지혈밴드가 젖으면 안 돼서 설거지랑 빨래는 케군이 했다. 머리도 감겨 달라고 부탁했더니 옆에 있던 아들이

“엄마! 내가 감겨줄게~“

라며 아빠를 넣어두고 날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아홉 살 아들은 병든 노모를 보살피듯 구석구석 씻겨주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잠시 다친 게 나쁘지만은 않을 정도였다.


근데 이튿날부터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나.

왜지..? 왜 물에 젖어도 괜찮지..?

이제야 하이드로콜로이드의 제대로 된 사용법과 원리를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 녀석 1980년대에 개발돼서 나랑 나이도 비슷한 게 아닌가. 생각보다 오래됐네. 제일 내가 미덥지 않았던 건 이걸 붙일 거면 소독을 안 해도 된다는 점이었다. 소독한 부위에 감염되지 말라고 반창고를 붙였던 거 같은데 물로만 씻으라니. 원래 알던 거랑 너무 상충되니까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신용이 안 갔다.


하지만 피를 3시간 쏟은 후엔 각 잡고 찾아볼 마음이 생기더이다. 살갗색을 가진 얘는 모든 것이 다 피부 같았다. 상처 부위에 붙이면 진물이 나오면서 하얗게 부푸는데 그 삼출물이 새포재생도 시키면서 세균감염도 막기 때문에 상처 부위의 소독도 필요 없는 것이었다.  딱지 아래 일어나는 일들이 살색 고무 같은 이 아이 밑에서 일어났다. 근데 우리가 상처 입은 후에 흉터가 생기는 이유는 상처를 입어서가 아니라 딱지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딱지는 사실 생략 가능하다면 생략하는 편이 우리 피부에 이득이었다.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게 하이드로콜로이드이고 딱지가 없으니까 너무나 깨끗이 낫게 해 준다는 원리라고 한다. 모르고 썼을 땐 얘도 괜찮네. 나쁘지 않네. 그랬는데 알고 쓰니까 이건 뭐 빅 발견, 인류의 승리다. 전율이 일었다.


선생님 지시대로 매일매일 상처를 깨끗한 물로 씻고 새로운 걸로 갈아줬다. 한 달쯤 됐을 땐가? 진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퉁퉁 불은 손가락 주변의 피부가 양파처럼 겹겹이 떨어져 나가더니 어느 날은 훌렁하고 손가락만 한 손가락이 탈피를 했다. 내 손가락이지만 너무 징그럽고 이상했다. 사람은 매일 피부 각질이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던데 그걸 못하게 막고 있다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광경을 본 건가?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나는 손톱 주변을 손톱으로 뜯는 악습이 있다. 그래서 늘 딱딱하게 굳은살이 있고 피부가 벗겨져 빨개 보이고 항상 못살게 괴롭힌 흔적이 많은 못생긴 손이었는데 한 달은 아무 짓도 당하지 않은 데다 탈피까지 마친 내 오른쪽 검지 손가락 하나가 마치 갓 태어난 손가락을 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런 손가락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보자마자 소중함이 피어났다.


그래서 하이드로콜로이드에 대한 납득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과연… 옛날 일본 사람들도 다치면 일본 된장을 발랐을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다들 소름 끼칠 준비하시길.

「かあさんの歌」

'かあさんのあかぎれいたい 生みそをすりこむ'

어머니의 노래라는 제목의 일본 노래에

’ 엄마 손가락 상처 아파, 된장 발라 ‘

라는 노래 가사가 있었다. 오카야마 현 출신의 작곡가가 만든 곡으로 오카야마 지역의 민간요법이 그대로 노랫말이 되어있었다. 이 노래를 조선에 살던 일본 사람들에 의해 우리나라에도 퍼진 게 틀림없다. 참고로 근거 없는 치료법이다. 오히려 악화된다.



참, 손가락을 다치고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이틀 칭칭 감은 지혈 밴드는 정말 방망이만 하게 컸다. 누가 봐도 존재감이 뿜뿜이었다. 그런데도 다친 다음 날 당장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서 두 시간만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주문받고 스파게티를 나르고 커피를 내려놓고 그 방망이가 많은 손님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한국에서는 처음 간 식당이라도 누가 칭칭 감고 일하고 있으면 “어머~ 아프시겠다~” “아유 다치셨나 봐요.” 지나가는 말을 할 거 같은데….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스무 명에 한 명이라도? 그날 일하는 동안 아무도 내 손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서른 명 넘는 손님이 단체로 이게 안 보이는 듯이 말이다. 뭐 도쿄 사람들 특기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단골손님이 왔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보고 무슨 말을 건네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이나 보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나오면 "아이 방학이 끝났나 봐요?" 그런 말도 해 줬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신다.


주방에 들어가서 나카하라상에게 호소했다.

나랑 같은 주부 아르바이트지만 경력이 10년 선배다. 경력뿐만 아니라 나이도 10살 많고 전직 교사에 두 아이 모두 성인인 인생의 대 선배다. 직설적이고 일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주의를 자주 준다. 그래서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굉장히 말 걸기 힘들어하는데  처음엔 나도 어려웠지만 5년을 같이 일해보니 깐깐하게 가르쳐주는 나카하라상 덕분에 감사하게도 내 스킬이 늘어나고 실수가 줄었다. 이런 분이 가끔 칭찬을 해 주시면 또 듣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지는 기분이 강하게 든다. 아무튼 그런 나카하라상에게 나는 애정이 생겨서 은근슬쩍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쓸데없는 잡담도 가능해졌다.


"나카하라상! 아무도 이 손가락에 대해 말을 안 해요. 안 보이는 거 아니죠?"

"말 안 하죠. 아무도 안 할 걸요. 절대 안 하죠. 하면 지는 거예요."

(푸하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심판 누가 보는 건데. 대체 무슨 게임이었는데.

나카하라상이 농담해 주면 너무 의외라 기본값보다 두 배 웃기다. 나카하라상 말 그대로 다들 누가 먼저 손가락 얘기 꺼내나 눈치 게임 하는 것 같았다.


며칠 후, 재일교포 친구 두 명을 만나서 이 일을 얘기해 줬다. 그렇게 눈에 띄는 손가락을 하고 있는데 수십 명이 보이는 척도 안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내 손가락에 맺혀있었다는 이야기. 그러자 반대로 교포 친구들이 물었다.

"언니 한국에서는 단골도 아닌데 처음 보는 점원하고 그런 얘기해도 돼요?"

"그렇지. 아프시겠다~ 이런 얘기할 수 있지."

교포 친구들은 아이들 키우면서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것 중 하나가 보통사람과 다른 용모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이 나타나면

“쳐다보지 마..! 이쪽 봐..! 눈길 주지 마! 모른 척 해!”

속삭이며 무반응을 훈련시킨다고 했다.


치마 입은 아저씨, 양갈래로 머리 땋고 핑크 드레스를 입은 할머니, 기괴한 화장을 한 사람들을 도쿄에서는 종종 본다. 그러면 아이들은 솔직하게 바로 시선을 못 박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강도 높은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도쿄 사람들의 그런 문화가 장점이 되는 경우도 아주 많다. 틱 장애가 있어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안 보이는 척해 주니까 그런 분들이 밖에 나오기 편하지 않았을까.


"아니 근데 손가락 다친 건 엄청 큰 사연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이야기 나눌 수 있잖아." 그런 시민의식은 높이 사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자 재일교포 친구들이 동시에 말했다.

“뭐라고 해야 돼요?”

"첫마디를… 뭐라고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아…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스몰 토크를 건네야 할지 모르는구나.

"그리고 내 작은 한마디에 사실은 크게 상처받고 막 고민하다 극단적 선택 같은 거 하면 어떡해요."

아니 누가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사냐며 웃다가 전부 농담은 아닐 거란 분위기에 서늘해졌다. 진짜로 그런 상상에까지 한다고?


남편이랑 아이를 데리고 겨울철 한국에 갔을 때였다. 아이는 감각이 예민해서 목에 뭘 두르면 짜증을 냈다. 목이 조이는 셔츠, 목 폴라, 후드 티도 싫어했다. 그래서 영하의 서울을 목도리 없이 돌아다녔더니 만나는 아주머니마다 말했다.

 “아이고 애 목에 뭘 좀 둘러줘야겠다.”

케군이 말했다. “知り合い?” (아는 사람이야?)  

내가 말했다. “아니.”

두 번째 아주머니가 말했다.

“애기 목도리 없어? 휑 하네~.”

케군이 말했다. “아는 사람이야?”

내가 말했다. “아니.”

세 번째 아주머니가 말했다.

“목이 따뜻해야 감기 안 걸리는데~.”

케군이 말했다. “아는 사람이야?”

내가 말했다. “아니.”

그놈의 목도리...  ‘와… 가끔 오면 좋은데 맨날 여기서 애 키우는 친구들 힘들겠다.’ 혀를 내둘렀다. 그러던 내가 이제 어이없게도 아무도 말을 안 걸어줘서 삐져서 재일교포 친구들과 이런 토론을 하고 있다니.


작은 오지랖이 독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반론하던 교포 친구들 앞에서 이 문화가 어느 쪽이 좋은고 나쁜지가 아니라… 나는 이렇더라 하고 느낀 그대로 내 마음을 흘렸다.


"그냥 나는… 寂しかったの (외롭더라고...)"

"아…"

친구들이 갑자기 말을 잃었다.

"그게 언니를 외롭게 했구나..."


면식이 없는 사람끼리 절대 대화하지 않는 도쿄의 분위기가 사람을 외롭게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나도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긋지긋할 땐 언제고 없으니까 허전하고 쓸쓸한 이 마음을. 그리고 도쿄에서 자란 친구들은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는 것도 놀라웠다. 줬다 뺐으니까 아쉬운 거지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으면 그게 아쉽지도 않은가 보다.


그다음 날 영어 회화 수업에 갔더니 호주 출신 사이먼 선생님이

“오~ 손가락 왜 그랬어요~”

하고 물었다. 마음에 모닥불 하나가 지펴지며 순식간에 따스해졌다. 타인에게 삭막하리만큼 선을 긋는 도쿄에서 남은 평생을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지. 서글퍼지던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래, 도쿄에 사는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나는 작은 오지랖으로 모닥불을 켜 줘야겠다. 우리가 느꼈다가 빼앗긴 그 따스함을 우리끼리 주고받는 것도 괜찮겠다. 어떤 결심 같은 게 피어났다.


도쿄에 사는 외국인 분들 사람들이 사적인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말아요.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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