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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Oct 16. 2024

<사다리 걷어 차기>

 초여름 장마다. 엄청난 비였다. 굵은 빗방울들이 현관 앞 간이 투명지붕에 떨어졌다. 지붕과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닫힌 문을 통해서도 요란스럽게 들렸다.

영진은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았다. 창밖에 보이는 옆집 벽의 빨간 벽돌들에 두 눈을 고정시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탈력감을 느꼈다.


"너무 지쳤어. 나는 나를 너무 착취했어."


 영진은 며칠 전에 읽은 [피로 사회]*의 문구를 계속 중얼거렸다. 영진은 재래시장 한복판에 있는 상가주택 1층 집에 살았다. 상가주택은 시장 쪽으로 가게가 4개 있었다. 빵집, 족발집, 정육점, 생선가게였다. 시장에서 모퉁이를 돌면 대문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아스팔트 마당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영진의 집은 2층 마당을 천정으로 하는 상가 옆에 붙은 집이었다. 빵집과 벽을 공유했다. 2층엔 남매를 둔 40대 부부가 살았다. 영진은 2층 가족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영진은 1년 전 LH공사의 청년주택 대출지원을 받아 비교적 저렴한 이자를 내고 집을 구했다. 다행히 집세는 덜 걱정되었다. 영진의 집은 대문을 나와 모퉁이만 돌면 재래시장이어서 식생활비도 적게 들었다. 영진은 중소기업에서 2년 6개월을 근무하고 퇴사했다.

영진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마다 시장을 돌아다녔다. 강서구에서 먹을거리가 풍부하기로 유명한 남부 시장이었다. 떡, 과일, 족발, 떡볶이, 순대, 튀김, 만두, 잔치국수 등 다양한 요깃거리와 식사로 할 만한 음식들이 시장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영진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 와서 끼니를 해결했다. 거의 두 달 가까이를 빈둥거리고만 있었다.


 옆 집도 2층 상가주택이라 1층에 복권가게랑 전통찻집이 있었다. 영진은 금요일마다 로또 복권을 수동 만원, 자동 만원 2만 원어치씩 샀다. 전통차도 매일 한 잔씩 마셨다. 깔끔한 중년 부인인 찻집 여주인은 영진에게 살갑게 대했다. 영진이 자신의 둘째 딸과 또래 같아 보여 괜스레 정이 간다고 했다.

언젠가 찻집 주인이 나이를 물었을 때, 영진은 손바닥을 오른쪽 머리 위에 얹고 손가락들로 두피를 긁적였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살짝 미소도 지었다.


 '나이를 말할 필요는 없지. 말리지 말자.'

 영진은 마음속으로 경계했지만,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찻집 주인은 영진의 반응을 보고 주문한 차가 나왔다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영진은 제대로 빗지 않아 산발이 된 머리를 노란 고무줄로 묶었다. 하얀 티에 하늘색 운동복 반바지를 입고 매일 전통찻집을 들렀다. 찻집 주인은 영진에게  한방차를 한입 약과나 작은 떡과  정성껏 차려 주었다. 

에스프레소 잔에 주문 외의 다른 종류의 차도 서비스로 줬다. 영진은 돈을 더 내지 않고 다른  차까지  마시니까 대접받는 것 같아 좋았다.

항상 직장에서 뜯기기만 해서 피해의식이 생긴 영진에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특히 쌍화차나 대추차를 마실 때는 마음의 감기가 낫거나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냥 평생을 먹고 자고 놀고만 싶었다.


 영진은 회사를 그만둘 때 받았던 압박감과 모멸감을 잊고 싶어 되도록 전 회사에 대한 생각은 안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거래처에서 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고 했을까? 항상 하던 대로 대했고 실수도 없었는데, H회사 대리는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내가 좀 참았어야 했나? 너무 호기로웠나?" 

영진은 혼잣말로 자주 중얼거렸다. 억울해서였다.


 1년 동안 잘 유지되었던 거래처 직원이 직속 부장에게 직원 교체를 요구했다. 부장은 거래처 직원 편만 들었다. 부장의 차가운 태도에 영진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었다.

평소에 언니라고 부르라고까지 하면서 온갖 부서의 일을 영진에게 맡겼다. 다른 사람은 믿고 맡길 수가 없다며 많은 일들을 영진에게 던져줬었다. 안 부장은 영진을 면박을 주면서 입사동기인 진우에게 영진의 거래처를 배정해 버렸다. 영진의 실적이 뚝 떨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 영진의 영업관리 능력을 계속 문제 삼았다.


거래처인 ㅇㅇ 임플란트 회사는 대규모 횡령 사건이 나서 회사가 뒤숭숭했다. 전체 직원들을 감사하고 취조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거래처 직원인 H대리는 스트레스를 납품업체 직원인 영진에게 푼 것이었다. 영진은 안 부장에게 계속 무시를 당해야 했다. 영진은 정중하게 H대리에게 사과도 해보고, 안 부장의 비위도 맞추어 보고 항의도 해보다, 갑자기 사표를 내버렸다.


영진은 회사를 다닐 동안 중소기업 청년공제 지원금을 받아 저축한 거에 비해 많은 돈을 받았다. 퇴직금도 나와서 아껴 쓰면 1년 정도는 일을 안 하고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매주 로또를 사다 보면 1년 안에 당첨되어서 오랫동안 여행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3주 정도 복권을 샀는데, 5,000원짜리도 안 돼서 돈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권 1등에 2번 당첨된 사람이 복권은 무조건 꾸준히 사라고 했다. 그래도 영진은 6만 원이 매우 아까웠다. 6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영진은 복권에 꿈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했다.

사실 1년 정도 비어 있었다던 옆 집 가게에 로또가게가 들어온 지도 6개월 정도 되었다. 영진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처음으로 복권을 샀다.


"뭐 없나? 너무 지치고 우울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하지만 동남아 지역은 여행하기에는 너무 더울 것 같아. 유럽은 너무 비싸고. 여행하기 시작하면 돈은 금방 떨어지겠지."


영진은 복권을 사는 것처럼 여행에 대해서도 망설여졌다.

젊은이는 여행으로 넓은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지만, 여행을 많이 다니는 친구들은 카드 빚에 시달렸다. 영진은 회사에서 동냥 커피를 마시던 지아가 생각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아는 작년에 호화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후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영진은 빗소리를 들으며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사다리 걷어차기 EVENT


7월 1일부터 9월 31일까지 12차례에 걸쳐 진행됨


3차 모집; 7월 16-20일 4박 5일


사다리 걷어차기 게임의 승자는 세계 어느 곳이든 원하는 지역을 여행할 수 있는 비행기 티켓과 10돈의 황금열쇠(행복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았습니다), 여행 시 필요한 물품들을 살 수 있는 현금이 든 여행가방을 선물 받습니다.


네버랜드 리조트


*추신

1.  네버랜드의 사다리 걷어차기 이벤트는 호수물이 너무 차가워지면 진행될 수 없음을 공지합니다.

 2. 여행가방은 유명한 화가 쿠사마 야요이와 협업해 만든 작품으로 여행가방 자체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작품을 선물 받는다면 정말 엄청나겠다.'

 영진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작품들이 최근 경매에서 자체 최고가를 계속 갱신하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하트 모양의 이미지들이 무수히 반복되고 겹쳐있는 여행가방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더 알아보기를 눌렀다.


"참가비가 200만 원? 4박 5일에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제공에 부상이 발생할 때를 대비한 보험 가입까지 포함해도 너무하네. 차라리 해외여행을 가지."


가격을 보는 순간 화가 난 영진은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날 밤 영진은 잠이 오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남해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떠올랐다. 영진은 시금치 밭에서 수확을 하시는 부모님을 돕다가, 밭으로 날아온 근처 골프장의 공을 주웠었다. 골프공의 작고 단단한 느낌이 만질 때 좋았다. 골프공의 홈이 몇 개인지 세다가 지쳐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공의 모델마다 달라 딤플이 300에서 450개라는 것도 알았다. 자라서 돈을 많이 벌면 멋진 리조트에 부모님을 모시고 자고 와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영진은 시골에서 그래도 반에서 1등을 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진학했을 때, 꿈에 부풀어 고속버스를 탔던 게 기억났다. 취직을 대기업에 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공대 공부가 영진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으로는 학비와 집세를 충당하기에 부족했다.

영진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영진은 고군분투해서 대학을 졸업했다. 특히 시험 때는 일하랴 공부하랴 잠을 네다섯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영진은 학점이 썩 좋지 않아 중소기업에 간신히 취업했는데, 어이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부모님은 그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녀는 여기저기 지원서를 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쳐 널브러져 있었다.


영진은 먼저 직장을 구하고 그만두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혹사당했다는 피해 의식이 마음속에 뱀이 똬리를 트고 머리에 새가 집을 지은 듯 무게까지 느껴졌다.

새가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오는 것처럼 회사에서 있었던 마음의 상처가 되었던 사건들이  시시때때로 떠올랐다. 아무리 잊거나 무시하려고 노력해도 자꾸자꾸 떠올랐다. 영진은 퇴사 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들 수 없자 영진은 네버랜드에 대해 검색했다. 고급 호텔이고, 사장의 아버지가 쿠사마 요이가 뉴욕에 있을 때 같이 공부하고 활동했던 조각가였다.

사다리 걷어차기 이벤트는 시작한 지 15년이나 되었다. 이벤트를 시작할 때 화가 야요이의 가방을 50개 제작해서 호텔이 마련한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경기 방식은 참가자 전원의 비밀유지 서약을 받고 진행되어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네버랜드는 중세 성 모양의 시설에 호수가 둘러싸고 있어 마치 롯데월드의 매직 아일랜드 모양이었다.


사다리 걷어차기 이벤트는 영진은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다. 참가자격 기준이 20살부터 35살까지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가 보안을 유지하고 있어 알 수가 없었다 참가자들이 비밀유지 계약을 위반하면 엄청난 위약금이 있는 걸로 추정되었다.

 영진은  전 재산의 10퍼센트를 투자해 이 이벤트에 도전할 만한 일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다음날 아침 영진은 세수를 하고 오랜만에 거울 앞에 앉았다. 30분 이상  화장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화장을 끝낸 후 영진은 비참한 기분이 들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읽는 책인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책장에서 꺼냈다. 직장을 그만둘 때도 읽었었다.

영진은 이 책을 읽고 난 후, 정신건강이라는 자산을 잃느니 다니는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고 판단했다.

진은 책에서 줄 친 부분들만 골라 읽으며 자신의 자산을 점검했다. 진은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자신은 돈은 많지 않지만, 정서적, 신체적 자산이 무척 풍부해 앞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위로를 받곤 했다.


특히 부모님의 든든한 정서적 지원은 영진이 절망에 빠질 때마다 굶지 않고 식사를 챙겨 먹는 좋은 습관을 유지하게 했다. 영진은 3주 동안 생각했던 일들을 천천히 떠올리며 간략하게 메모했다. 메모가 끝난 후 분식점으로 꼬마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집 근처 헬스클럽에 가서 두 달을 등록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네버랜드에 8월 15일에서 19일에 열리는 사다리 걷어차기 이벤트를 전화를 걸어 신청했다.

신청하는 순간 영진은 온몸에서 큰 에너지가 뿜어지는 걸 느꼈고, 오랜만에 마당으로 나가 맨손 체조를 했다.


"재빠르게 올라가서 다른 사람들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말 거야."


영진은 체조를 하며 주문처럼 되뇌었다.





*[피로사회] 저자 한 병철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2012년 3월 5일 출판.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이다.'


* [계층 이동의 사다리] 저자는 루비 페인 출판사 황금사자 2011년 5월 30일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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