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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Oct 12. 2024

<어느 날>

 정은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할 일이 너무 많아 도통 글쓰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친정아버지를 데이케어 센터에 보내는 문제로 오빠와 의논을 했다.

 아버지는 최근에 인지 장애로 장기 요양 등급을 받았다. 셔틀버스를 태우는 문제 때문에  오빠와 당번 횟수와 요일을 조율 중이었다.


어제는 시어머니의 제사를 하느라 자투리 시간도 낼 수 없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꽉 찬 6년이 되었다.


''마감은 다음 주 금요일인데 과연 작품을 낼 수 있을까? '


정은은 한 치 앞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모모>에서 나오는 카시오페이아 거북이처럼 30분 뒤  미래까지만 안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편할까. 정은은  <모모>를 읽고 난 후, 30분 미래까지를 아는 초능력을 가진 후 세상을  자주 상상하곤 했다.

태블릿을 들고 검지로 새 문서를 누르자 하얀 백지가 떴다. 다시 시작이다.


 정은은 단편 소설을 <레이디 지지>에 연재하고 있다.

매달 같은 소재에 대한 다른 내용의 단편소설을 연재하는 것은 정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20대에서 40대 여성들이 주독자층인 패션잡지 편집자의 문학 사랑이 정은의 연재를 가능하게 했다.


 <레이디 지지>의 편집자 재연은 베어브릭*수집가였다.

재연은 책장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는 베어브릭들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고 인형들의 위치를 바꿔  놓을 때 뿌듯함을 느꼈다. 재연은  평소와 같이  베어 브릭들을 재배치하다 번뜩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베어브릭처럼 같은 소재에 대해 매번 다른 주제를 잡아 글을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공모로 작품을 모집했다.  쿠사마 야요이의 '사다리와 여행가방 '작품을 소재로 1월부터 12월까지

손바닥 소설이나, 단편 소설을 연재하는 기획이었다. '


정은은 자신이 구독하던 <레이디 지지> 잡지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조각 작품을 소재로 1년 동안 12편의 엽편이나 단편을 연재할 작가를 공모한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2년 전에 정은은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엑스 출판사의  글쓰기 강좌를 발견하고 등록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은은 작년 11월 한 금융조합에서 연 숲에 대한 단편소설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정은이 거래하던 금융조합이었다. 정은은 우연히 적금 들려고 조합을 들렸다가 현관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봤다. 공모전 포스터를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참여했었다.

금상의 상금은 50만 원이었다. 상금을 받은 후 정은은 글 쓰는 것이 자신의 천직으로 여겨졌다.

여기저기 공모전을 검색하게 된 것도 금상수상 이후 생긴 습관이었다.


 정은은  <레이디 지지> 공모전에 지원했는데, 다행히도 세 편의 후보작에 뽑혔다. 후보작들은 세 달에 걸쳐 가나다 순으로 잡지에 실렸다. 그 후 독자들의 투표로 정은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확정되었다.


정은의 후보작은 성형을 한 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여러 남자들을 유혹하며, 돈과 명예를 좇는 젊은 여성을 그렸다. 어쩌다 보니 정은이 글을 쓴 후 한 정치가 부인의  과거 스캔들이 대서특필 되며 족집게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 덕에 독자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정은은 자신이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기적은 어느 날 일어난다라는 것을 정은은 경험했다. 벌써 4번째 작품을 연재할 차례다.

여행을 떠나는 은퇴한 부부, 사다리 걷어차기 대회에 참여하는 퇴사한 젊은이를 첫 작품 이후에 썼다.

이제까지 3편의 단편소설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게 지금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잡지사는 매번 참신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원했다.


글을 쓰다 보니, 정은은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이 작품의 속편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것처럼 소설 속 인물들도 가상의 공간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실체가 있는 존재가 되었다.

 길에서 보이는 모르는 사람들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더 친밀하게 다가왔다.

정은이 글쓰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되지가  않았다. 생각대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길을 잃었어.”


정은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 머릿속에서 자신이 사다리를 타고 한없이 올라가는 상상을 했다.

하늘과 맞닿은 끝이 없는 사다리였다. 상상할수록 소설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든다면 사기나 거짓말이랑 뭐가 다르지?


'사다리로 하늘 끝까지 오르면, 내려올 때는 하늘을 나는 가방을 타고 내려와야겠다.'


 정은은 하늘을 나는 가방이 폭죽으로 타버려 못쓰게 되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어릴 때 책에서 읽은 이야기였다.

정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기분이 밝아졌다.

나이가 많이 들었다. 수많은 경험들이 정은이 살아온 시간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는 정은의 뇌세포들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가 한 번씩 나타난다.


 정은은 요술 가방에 요술 사다리를 집어넣고 긴 여행을 떠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동안 계속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소설이니까 가능하기는 한데 왜 이 이야기가 떠오른 거지? '


정은은 이야기를 바꾸었다. 자동차 트렁크 안에 접이식 사다리와 여행 가방을 넣고 어디론가 떠나는 중년 여인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제는 마법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정은을 힘들게 했다.

정은은 혼잣말로 자신에게 속삭였다.


“요술이나 마법이 있을 수도 있어”


 


* 베어브릭; 곰(bear)과 브릭(brick)의 합성어로 곰모양의 장난감을 뜻한다.  2001년 일본의 메디콤 토이사가 개발한 어른을 위한 수집용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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