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를 키우며 마주한 나의 바닥, 그 적나라한 이야기
임신을 하고 처음 초음파 상으로 다리가 짧다는 소견을 들었을 때, 대학병원 외래를 다니면서, 조기진통과 임신중독으로 입원을 하면서도 ‘무엇이라 기도해야 하는가’가 나의 질문이었다. ‘제발 장애가 아니게 해 주세요? 난 못해요?’라고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해야 하는가? 그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내가 잘 받아들이길 기도해야 하는가? 어떤 상황이든 주의 뜻이니 잘 감내하고 따르길 기도해야 하는가?
아이가 NICU 안에서 여러 수술과 치료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회에서 함께 금식으로 중보도 해주고 마음을 모아주었다. 나와 신랑도 매일 저녁 금식을 하다가, 나는 몸에 이상 증세가 생겨- 피부가 난리 나고, 속도 안 좋고- 아이 낳은 후에 아직 몸 회복이 안 되었는가 하여 금식은 그만두고 기도만 했다. 근데 뭐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기적이 생기길 바랍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을 지어다!?’
내 믿음이 겨자씨만도 못해서 우리 아이가 낫지 않는 것인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기고 있는데도 장애가 생기는 사람들은 그럼 무엇이지? 내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인가? 나는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니 이 상황에도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저 모든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난 따르겠다 해야 하는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길 바란다. 아이가 건강히 모든 것이 나아서 우리와 함께 일상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 발달도 그대로 하고 정서적 심리적으로 모두 안정되는 것, 이러한 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 너무나 완벽한 시나리오지 않는가? 근데 하나님이 갖고 계신 시나리오는 내 것과 같을까, 다를까?
처음에는 계속되는 부정적인 얘기에도,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내가, 그래도 강하구나, 잘 견디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면 미쳐갔을 텐데 그나마 우리라 견디고 있구나’ 하고 교만했다. 말도 안 되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믿음은 정말이지 겨자씨만도 못한 것을 느꼈다.
마음은 계속 낙심되고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주변에 하필 임신한 친구들이 많아서, 그들은 건강한 아기를 잘도 낳는데 우리 아기는 병원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원망스럽고 슬프기만 했다. 나에게 건네는 위로와 격려가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허망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위로한답시고 건네는 모든 신앙적인 말들도 필요가 없었다. 화가 날 뿐이었다. ‘그럼 너네도 겪어보시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마음이 계속 뿔이 났다. 강퍅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면담을 마치고 무너지는 마음으로 흐느끼며 대학교 교정에서 울던 날이 며칠이던가. 신랑과 전화기를 붙잡고 상황을 전하며 같이 울던 날도 생각난다. 코로나가 고마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없는 교정이라 다행이었고 마스크를 써서 내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니 다행이었다. 둘째 아이가 병원에 있을 때도 첫째를 돌봐야 해서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내 상황이 더 슬펐다. 이 모든 날을 웃으며 말할 날이 과연 올까? 지금은 터널이 너무나도 길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게, 우리 부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왜 우리는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우리에게 왜 이러시는 건가. ‘왜’라는 물음이 끊이지 않는다. ‘왜 하필 우리인가.’ 그렇게 아니길 바랐는데 결국은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뜻이 있는가. 어디에 소망을 둬야 하는가. 너무나 어렵다. 난 정말 무엇이라 기도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