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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Jun 13. 2023

외국인 남편을 한인마트에 혼자 보내면?

시래기는 어디에

주말에 날씨가 꿀꿀하니 감자탕을 해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20분 넘는 거리에 있는 한인마트까지 차를 타고 가야하고, 주말에 한인마트는 말 그대로 전쟁터를 방불케한다는 것이었다. 아, 누가 뭐 먹을지 정하고 다 사서 준비해서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며 툴툴거리자 남편이 호기롭게 자기가 혼자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뭐 어디서 찾는지 다 아냐고 했더니 다 안다고 했다.


"You know where Shiraegi is?(시래기도 어딨는지 안다고?)"

"Shuiroegi... what was shuiroegi?(쉬뤠기.. 쉬뤠기가 뭐였지)"

"Not Shuiraegi, Shi-Rae-Gi. Dried radish.. is it radish? anyway, dried radish top. You sure know where to find? (쉬뤠기 아니고 시-래-기. 말린 무청.. 있잖아.. 한인마트에 어딨는지 안다고?)"

"Oh, I know Shiraegi. Dried and in the bag (아! 알아 시래기, 말린거 봉투에 들은거)"

"It's the one all boiled, prepped and packaged. It's at the refrigerator section where yello radishes are (다 삶아서 패키지에 들어있는거, 단무지랑 이런거 있는 냉장고 섹션에 있는거)"

"I know, I know. It's the white bag. I can go. (알아 알아 하얀 패키지잖아. 내가 다 할 수 있음)"


한인마트에는 보통 나와 같이 간다. 남편도 웬만한 건 어딨는 지 아는데, 시래기가 영 걸렸다. 나도 찾기가 힘들어서 마트를 3바퀴는 돌다가 찾았었다. 시래기 어떻게 생긴 지 아는 거 맞겠지..?


감자탕에는 시래기가 들어가야 맛있는데. 아이들을 오래 가르친 촉으로 보건대, 어디서 찾는 지 영 모르는 것 같았다. 분명히 신선채소 있는 데를 뒤지거나 말린 나물 있는 데를 헤메일 것 같은데.. 본인이 기어코 가겠다고 뭘 사올지만 문자 보내달라고 해서, 그럼 그러세요 했다. 문자를 상세히 보내드렸다. 한인마트에 홍콩반점도 있어서 아점으로 먹을 쟁반짜장도 추가.






그렇게 보내놓고 샤워를 하려다가 포기했다. 남편이 시래기를 못 찾아 영상통화 걸 것이 분명했다. 아니 마트보내놓고 샤워도 못하다니, 웃기구만 피식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것. 미국 SNL 에피소드 "Old Enought!- Long Term Boyfriend" 였다. 꽤 웃겨서 궁금하면 보시라고 링크를 첨부한다.


https://youtu.be/VhGTtWsW9F8


넷플릭스에 일본 티비프로그램 "Old Enough!" 이라는 게 있어 본 적이 있다(한국 넷플릭스에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나도 혼자할 수 있을 만큼 형님이라구요!" 정도 될 것 같다. 만 2-8세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혼자서 가게, 병원, 마트 등을 들르는 심부름을 시키는 내용이다. 그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과 가던 길을 혼자서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눈물도 터뜨리고, 무섭지만 길을 건너고, 길을 잃어 주민에게 도움도 구하면서 씩씩하게 나름 심부름을 해 낸다. 부모님은 아이를 혼자 보내놓고 전전긍긍. 그 짧은 심부름 하는 동안에 아이들과 부모님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함께 기뻐하게 되는 귀여운 프로그램.


웃긴건 미국 SNL(어른 대상 코미디프로)에서 이 프로그램을 패러디했는데, 어린 아이들을 혼자 심부름 보내는 건 미국에서 할 수 없어 어린아이들과 똑같이 어찌할줄 모르는 (Helpess) 그룹을 선정했으니, 그것이 바로 오래사귄 남자친구였던 것이다!


한 커플이 나오는데, 남친이 옆에서 약간 나사 빠진 표정으로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다. 대문사진이 바로 그. 이 남자친구를 그 일본 프로그램처럼 입혀서 심부름을 보낸다. 세포라(미국 전국체인 화장품전문점. 한국에도 지점이 있다)에 들러서 스매시박스 아이라이너와 수퍼에 들러서 샬럿(양파같은데 좀 더 크기가 작은 채소)을 사 오는 것이 목표이다. 이 남친은 세포라에 혼자 가 본 적이 없어 울음을 터뜨리고, 샬럿이 뭔 지 몰라 양파를 두 망이나 사가지고 집에 온다. 여자친구는 집에서 긴장이 되는지 아침 10시밖에 안됐지만 와인이라도 마셔야겠다고 한다.


이 비디오 댓글에도 "사실 나도 샬럿이 어떻게 생겼는지 바로 얼마전에 내 약혼자가 알려줘서 알았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라고 써 있어서 웃겼다. 쇼에서는 대상을 오래사귄 남자친구로 써놨지만, 아니 내 상황이 이 쇼와 비슷하지 않은가! 미국인에게 한인마트에서 시래기 사오라는 건 그래, 훨씬 난이도가 높긴 하지만.





어김없이 남편은 전화를 걸었다. 시래기를 못 찾겠다고 ㅋㅋㅋㅋㅋ 역시 내 예상대로 신선채소 근처에서 헤매고 있었고, 말린 나물 섹션도 벌써 봤는데 없었다고. 어딨는지 다시 설명했더니 아 이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몇 분 후 한 번 더 전화가 왔다. 목록에 있는 걸 다 샀다며 확인시켜줬다. 잘 했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마침내 샤워를 했다.


그런데 하필 시내에서 행사가 열리는 바람에 큰 메인도로를 막아버렸고, 그 때문에 차가 엄청 막혔다. 남편은 10시 반에 나가서 한 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남편을 마트에 혼자 보낸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야기한다. 그는 배가 고팠음이 분명하다. 내가 보낸 목록보다 더 많은 쇼핑물품이 추가되어 있었다.

지금 먹으려고 쟁반짜장 2인분에다가 자기 마음대로 탕수육까지 추가해서 포장해 왔는데, 거기에다가 아침용으로 주로 먹는 페이스트리도 한 박스 사오고, 달디 단 꿀떡에 과자, 커피도 사왔다. 설탕과 탄수화물의 폭주가 아닐 수 없다. 참외는 한 박스 사려다가 두 개만 사왔단다. 사진엔 없지만 사과도 한 팩 사왔다.


나 꿀떡 안좋아하는데 다른거 사오지 했더니 자기가 먹을라고 샀단다. 생전 떡은 자발적으로 산 적이 없었는데? 쟁반짜장에 탕수육까지 있는데 빵은 왜 한상자나 사왔냐고 했더니 나 줄라고 샀단다. 내일 먹으면 된다고 방어한다. 배가 엄청 고팠나보다.


차가 너무 막히고 고생을 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이고, 뭐 커피가 달면 떡이라도 안 단거를 사오든가, 채소를 좀 같이 사오든가. 이 집에서 건강하려고 하는 건 나뿐이지 저걸 어떻게 다 먹나. 저 일본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도 어린이들이 자기 먹고 싶은걸 더 사온다든가, 엄마 먹으라고 울트라맨 음료를 사오든가 하던데.. 똑같구먼..ㅋㅋㅋㅋㅋㅋㅋ


남편에게 SNL 비디오 얘길 했더니 (사실 맨 처음에 이 비디오를 찾아서 보여준 것이 남편이었다), 자기는 그렇게 한심하지 않다고 한사코 선을 그었다. 한인마트에는 세포라처럼 누구에게 물어볼 수가 없지 않냐면서. 이건 다르다고. 맞는 말이긴 하다. 한인마트에 물건 채워넣는 분들은 라티노인 경우가 많아서 시래기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다. 아니라고 펄쩍 뛰는게 재밌어서 밥먹으면서 좀 더 놀렸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사실 쟁반짜장 사는 걸 까먹어서 고속도로 진입까지 다 왔다가 차를 돌렸단다.

ㅋㅋㅋ그래. 그 전쟁터에서 필요한 거 다 사왔으면 됐지. 고맙다 남편씨. 감자탕 맛나게 해줄게








대문사진-SNL Youtube screen shot. 제 남편 아닙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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