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살아남은 사람
사람들은 세상이 떠민 삶의 절벽에 매달렸던 경험이 존재할 것이다. 누구나 반드시 존재하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에 고비가 있기 마련이니까.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나 역시 그래왔던 시기가 있었다.
때는 2023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또다시 우울에 젖어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몸을 해하기 바빴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우리 집 난간에 매달려 당장 죽네 마네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나에겐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욱더 큰 고통이었기에. 지금 당장 왜 살아있는지도 의문이었고, 왜 죽지 않았는지도 의문이었다. 살아갈 희망은커녕 이유조차 진작에 없어져 있었다. 삶의 궁지에 몰린 이런 나를 두고, 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너 죽고 나면 당장에 나는 어떡하니.'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잘 살겠지 뭐.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면서 나 잊고 잘 살라고 덧붙였다. 인정한다,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렸다. 나는 매몰찬 거절의 의사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쭈그려 앉았는데 손등에 무언가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단 걸 눈치챘다. 이런 나 자신이 참 한심했다.
그러다 딱 한번, 내가 죽으면 남아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하고 진지하면서도 나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음, 아마도 엄마는 정말 죽을 정도로 울지 않을까 싶었다. 탈수가 와서 쓰러질 정도로 울다가 나에게 미안하다고만 하지 않을까 싶다. 너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다 엄마 잘못이라고, 못난 엄마라서 미안하다고 할 것 같다. 동생들도, 아빠도, 다른 가족들도 정말 슬퍼하겠지만 유독 엄마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울부짖으며 사과하는 모습이, 절규하는 모습이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듯 그려졌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라는 존재가 내 죽음에 있어 짐덩이가 된 것이.
죽기 전에 앞서 엄마를 생각하면 '뭐 어때. 잘 살겠지'싶다가 도 내 몸은 머뭇거렸다. 그렇게 나는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세상과 작별할 수 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수도 없이 많이 날려버렸다. 난간에 서서 뛰어내릴까, 고민하던 그 순간에 엄마라는 존재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무서웠다. 여기만 넘어가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죽음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가. 무엇에 의한 무서움이고 두려움인가.
그때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도 결국은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란 걸.
엄마가 나를 끈질기게 살려냈고, 그 결과 '여전히'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나는 살아있다, 여전히.
그리고 살아남았다, 우울의 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