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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같은 플랫폼, 같은 열차,

by 홍매화



알람처럼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나는 매일 이 열차를 타면서 오늘도 무사히 회사까지 도착하길 빈다. 눌린 알람처럼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 미세하게 부서지는 과자 봉지 소리, 누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참는 소리. 누구 하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도 걸지 않는다. 다들 핸드폰만 본다. 뉴스, 쇼츠, 주식창. 각자의 구멍 안에 처박혀 있는 사람들.


나는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피곤하다. 솔직히 좀 싫다. 이 얼굴로 회사에 가서 컴퓨터 켜고 또 아무 일 없는 척하며 앉아 있어야 한다. 아무 일 없는데 왜 이렇게 매일 지치는 건지 모르겠다.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누군가는 내리고 누군가는 탄다. 나는 아직 내릴 역이 아니다. 내릴 때가 되면 나도 아무 말 없이 내릴 것이다. 누가 보든 말든. 이 도시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 사람도 햇빛도 없이. 기계음 하나로.



월요병에 걸렸어요.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들리는 그 안내 방송. 익숙한데 이상하게 들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어딘가로 끌려가는 느낌. 내가 타려는 게 열차가 아니라 컨베이어벨트 같아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회사까지 이어지는 가장 어두운 통로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나는 점점 사람에서 무언가로 바뀌는 기분이 든다. 어느 날은 날카롭게 어느 날은 희미하게 들린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다.


플랫폼에 도착하면 늘 그렇듯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길게는 1시간 반도 걸리는 출퇴근길. 그 길을 매일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열차 속에서 보낸다. 플랫폼에서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들 비슷하다. 피곤한 건지 무표정한 건지 포기한 건지 구분이 안 간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요즘은 웃는 법도 조금씩 잊어가는 것 같았다. 피곤한 걸 넘어서 아무 생각이 없어진 얼굴들.



열차에 올라간다.


열차에 올라타고 붙을 데 없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조용히 균형을 잡는다. 이어폰은 끼웠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말을 걸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막. 눈은 스마트폰 화면 위를 지나치지만 아무 내용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서울의 아침은 빠르다. 빠르다기보다는 숨 쉴 틈이 없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된다. 나라는 개인은 잠시 꺼두고 규칙을 잘 지키는 인간 모양의 기능이 된다. 그렇게 열차를 타고 출근한다. 오늘도 무사히 아무도 나를 눈 여겨보지 않기를 바라면서.



헬스장 인포데스크 직원입니다.


헬스장 인포데스크. 카운터에 앉아 있는 시간은 9시간. 회원님들의 절반은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친다. 사람들은 운동하러 온다. 그러면서도 바쁘다. 입장하면서 전화받고 러닝머신 뛰면서 회의하고 운동이 끝나면 택시 부르면서 나간다. 도착. 운동. 퇴장. 반복. 매일. 계속. 정해진 시간에 오는 사람도 있다. 그 회원남이 오면 시계를 안 봐도 몇 시인지 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머릿속에 자동 방송이 울린다.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냥 아무 의미도 없다. 그냥 익숙해서 떠오른다.


습관적으로 머릿속에 재생된다. 사람들이 도착하고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운동하고 나가면 끝. 그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는다. 나는 데스크에 앉아 있다. 방송이 다시 울린다.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사라진다.



손목은 그렇게 나갔다.


손목이 몇 달 전부터 아팠다. 처음엔 무시했다. 파스를 붙이고 스트레칭도 해보고 손을 왼손으로 바꿔도 봤지만 증상은 천천히 확실히 나빠졌다. 통증은 참을 수 있지만 반복은 피할 수 없다. 결국 오른손이 나가고 왼손도 따라 나갔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아프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는 계속 그 방송이 맴돈다.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었던 그 문장. 이유 없이 떠오르고 이유 없이 머문다.


내 일상도 그 기차에 끌려가는 기분이다. 의자에 앉은 채로 움직이는 열차에 탑승한 사람처럼 계속 여기에 있으면서도 계속 어디론가 밀려가는 중이다. 이 열차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나는 어디서 내릴지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나를 스쳐 지나가고 나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가끔 내 기억조차 흐려진다. 수건은 줄어들었다가 다시 쌓이고 물병은 비워졌다가 다시 찬다. 매일 똑같은 장면인데도 왜인지 점점 멀게 느껴진다. 나는 점점 투명해지는 중이다.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타고 누군가는 내리고 나는 오늘도 여기 서 있다.



네 알겠습니다


회사에 도착하면 또 다른 버전의 자신이 작동한다. 웃는 얼굴, "네, 알겠습니다"를 잘하는 목소리, 다른 사람들의 말에 적당히 리액션하고 필요하면 늦게까지 남는다. 성실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성실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혹시 그 성실함 뒤에 무력감이 숨어 있다는 걸. 오후는 길다. 눈이 감기고 집중은 안 되고 창밖을 보면 회색 건물뿐이다. 어릴 때는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게 될 줄 몰랐다. 꿈은커녕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바란다. 어떤 의미도, 감정도, 관계도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


퇴근 시간이 되면 사람들의 말수가 많아진다. 누군가는 연인을 만나러 가고 누군가는 동료와 술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냥 집에 간다.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는 아침보다 더 피로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 칸에 백 명쯤 들어 있는데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눈을 피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처럼. 어떤 날은 나도 그들 중 하나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볼 것도 없다. 아마도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척하는 것이다.



퇴근길, 지하철은 오전보다 더 진하다.


피로, 한숨, 싸구려 향수 냄새, 그리고 방금 퇴근한 사람들의 생존 본능이 섞여 있다. 현지는 자리에 앉지 않는다. 앉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아서. 그러다 종점까지 갈까 봐. 그런 일은 한 번만 겪어도 충분했다. 집에 도착하면 불을 켠다. 하지만 방 안은 시원하지 않다. 방바닥도, 공기도, 심지어 냉장고 안의 남은 찌개마저도. 그래서 가끔 방에 들어가기 전에 복도에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다. 문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5분쯤. 오늘도 무사히 버텼구나.


집에 도착하면 현관 앞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아무도 없는 집. 불을 켜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켜두지만 보지 않고 배달 음식은 시키지만 남긴다. 하루를 버티는 데 성공했지만 그게 뭐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게 꼭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생각하며 옷을 벗고 적당히 씻고 이불 속에 들어가 핸드폰을 본다. SNS는 재미없고 유튜브는 시끄러워서. 화면을 끄고 불도 끈다.



마치며


잠들기 전 알람을 맞춘다. 내일도 같은 시간, 같은 플랫폼, 같은 열차.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맞춰 또다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눈을 감고 나면 다시 또 아침이다. 그리고 내일도 지하철 스피커는 똑같이 말할 것이다. 신창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 열차를 또 타고 오늘과 똑같은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다들 잘 살아가는 척하며 살아가듯이. 아무도 없는 지하철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하루를 보낸 채로.



그렇게 오늘도 독산역에서의 하루가 저문다. 끝이 없었기에 끝없이 이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적고 싶어서. 누구나 하나쯤은 품으면서 살아간다. 나도 감성에 잠겨보는 여름밤 끝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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