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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장 '비밀친구' 마니또

마니또 게임을 아시나요?

by 홍매화



배수구의 철학


"인포쌤, 여자 샤워실 3번 칸 배수구가 또 막혔어요."

오후 5시 정각.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안다. 매일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SOS 신호다. 장갑을 끼고 탈의실로 향한다. 배수구를 열자 검은 머리카락 뭉치가 반긴다. 처음엔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 머리카락들이 누군가의 '오늘도 운동 완료' 훈장처럼 느껴진다.



소주병을 내려놓던 날


오후 5시. 여자 탈의실 배수구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줍는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이 시간엔 포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을 텐데. 심으뜸의 11자 복근 영상 하나가 내 인생을 이렇게 뒤집어 놓을 줄은 몰랐다."


2023년 6월 어느 날. 숙취에 찌든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유튜브를 켰다. 알고리즘이 띄운 심으뜸의 운동 영상. 그녀의 11자 복근을 보는 순간, 묘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다음 날, 집 근처 헬스장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러닝머신 10분도 버거웠다. 힙 어브덕션 기구 앞에서 어떻게 앉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였다. 하지만 운동 후 쏟아지는 엔돌핀의 짜릿함은 소주 2병이 주던 흐릿한 취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운동은 내 일상의 중심이 되었고, 필라테스와 클라이밍까지 섭렵하며 '운동 덕후'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헬스장의 인포데스크에 앉아 있다.



첫 헬스장 방문의 어색함


처음 헬스장에 들어갔을 때, 그 분위기는 낯설고 불편했다. 신경이 쓰였던 것은 무거운 덤벨을 들고 자극적인 운동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나는 강도 높은 운동을 할 자신이 없었다. 벽면에 있는 다양한 기구들, 조명이 강하게 비추는 운동 공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집중하는 모습은 내가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단순한 스트레칭이나 가벼운 유산소 운동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이 따라오지 않아서 쉽게 지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심으뜸의 하체운동을 보며 '더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운동 중에 나만 아는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했다. 이 노력이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자 기쁨이 되었다.



운동이 주는 새로운 중독


운동이 주는 중독은 단순히 근육이 커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몸이 변하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지만 체력이 올라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나에게 큰 성취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운동 후 느껴지는 상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오늘 운동을 마치고 나면 내일도 더 강해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나를 계속해서 헬스장으로 이끌었다.


운동 중독은 사실 처음엔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찾아왔다. 내가 원했던 것은 단순히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지만 운동은 단지 몸을 단련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더 힘든 운동을 해낼 때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도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운동을 마치고 난 뒤에는 또다시 운동에 대한 갈망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체력을 키우는 것 이상으로 내면의 변화와 성장의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헬스장의 숨은 주인공


하루 업무 리스트를 보면 현기증이 날 때도 있다.

- 오후 3시 회원복 200벌 정리

- 오후 5시 여자탈의실 전체 점검


오후 3시, 땀에 젖은 수건 산더미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누군가는 이걸 '잡일'이라 부르겠지만, 나에겐 스무 살 소주병을 놓고 잡은 새로운 인생이다. 매일 회원복과 수건을 200벌을 정리를 하는 일은 내가 명상을 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오후 5시, 여자탈의실 전체 점검을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게 탈의실에 들어가 1시간마다 청소를 한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를 돕는 기쁨이 이런 것인가..


저녁 6시, 인포데스크에 앉자마자 단골 회원 박씨 아주머니가 "오늘도 고생 많아요. 덕분에 운동이 더 즐거워요"라고 건넨 비타민 음료 한 병에 모든 피로가 녹아내린다.



산처럼 쌓인 포대


일주일째 지속된 두통으로 병원을 다녀오느라 30분 늦었다. 오후 5시 30분, 여자 탈의실 문을 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포대 3개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각각 30kg는 족히 나가는 젖은 수건 포대들. 혼자 끌기엔 벅찬 무게다. "에라, 모르겠다." 첫 번째 포대를 붙잡았다. 10미터 베란다까지가 마라톤처럼 느껴졌다. 등에서 땀이 주룩 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도 곧 이 포대 속 수건처럼 땀에 젖어 있었다.


두 번째 포대를 끌 때쯤, 한 회원님이 지나가며 말했다. "인포선생님도 운동 중이시네요?" 맞다. 이것도 운동이다. 데드리프트 30kg 3세트쯤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포대가 바벨처럼 보였다.


데드리프트를 하며 일하는 중이었다.



첫 정규직 회원


저녁 6시, 런닝머신 소리의 리듬이 들린다.


입사 일주일 차, 처음으로 내가 상담한 회원이 등록했다. 60대 박 씨 아저씨.


"당뇨 때문에 의사가 운동하래요. 뭐부터 해야 할지..."
떨리는 마음으로 헬스장 투어를 시켜드렸다.

3개월 후, 박 씨 아저씨가 찾아왔다.
"혈당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고마워요."
그 순간, 내가 단순히 회원권을 판 게 아니라 누군가의 건강을 판 것 같았다.



인포에서 코치로


"어? 현지쌤이 턱걸이를 10개나 해요?"

늘 인사만 나누던 이 트레이너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냥... 틈틈이 연습했어요."


다음 날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트레이너가 운동 팁을 알려주기 시작했고, 회원들도 운동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냥 인포'에서 '운동하는 인포'가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였다. 운동 초보의 훈장이자, 헬스장 직원의 자격증이었다."



헬스장에서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 3가지


첫 번째는 헬스장에서 일하다 보면 동작을 할 때 궁금한 점을 트레이너들이 알려주는 점이 좋았다. 헬스장에서 일한 동기가 헬스에 큰 관심이 있어서 그렇듯 혼자 운동 동작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턱걸이를 못하는 헬린이에서 턱걸이 횟수가 0개에서 10개로 늘어났다.' 두 번째는 회원님이 '단백질 쉐이크나 프로틴 바를 감사하게도 종종 챙겨주신다.' 나는 월급날보다 이런 순간이 더 기다려진다. 세 번째는 '땀과 열정을 닦아주는 사람으로 회원님들과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나온다.' 헬스장의 비타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서 뿌듯한 순간들이 많았다.



헬스장 '비밀친구' 마니또


마니또 게임을 아는가? 비밀친구가 되어 누군가를 몰래 돕는 게임.

헬스장 인포는 현실판 마니또다. 회원들은 내가 새벽 6시에 회원복을 다림질하는 것도, 매시간 배수구를 청소하는 것도 모른다. 그저 깨끗한 수건과 쾌적한 환경이 '당연히'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괜찮다. 마니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게임이 끝나듯, 내 수고가 드러나지 않아도 좋다.


누군가 오늘도 깨끗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아, 개운해"라고 중얼거린다면, 누군가 막힘없는 배수구에 시원하게 샤워를 마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돕는 기쁨을 느낀다.


스무 살의 나는 소주병에서 행복을 찾았다. 스물 일곱의 나는 땀 냄새나는 수건 더미에서 행복을 찾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이 훨씬 더 취한다. 건강한 중독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오늘도 나는 헬스장의 비밀친구다. 그리고 이 비밀, 계속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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