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실제로 아이를 비교하지 않고 키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울 때, 아이들을 비교하는 것은 형제자매의 우애를 해치고, 서로를 경쟁자처럼 여겨서 부작용만을 생성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는 저희들은 일상의 언어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 이 휴지가 저 휴지보다 싸고, 이 고기가 저 고기보다 품질이 좋으며, 이 프로그램이 저 프로그램보다 재미있고 - 그리고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죠. 이러한 비교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언어습관과 행동습관은 우리의 뇌와 사고에 침투를 해서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비교하고 가치를 매기며 그에 따라 호불호를 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낳고 양육을 하면서도, 이미 아이의 행동이나 성품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자연스럽게 결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관습적인 잣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이가 커감에 따라서 부모와 자식 간의 옳고 그름의 잣대가 충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려서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들이 버릇이 없다고 불평을 하셨고 또 이는 몇천 년 전의 사람들의 기록을 봐도, 그때의 사람들 역시 젊은 사람들이 버릇이 없고, 자신들의 젊을 때 같지 않다는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 버릇이 나빠지고 나쁜 습관들이 생기는 것 같은데도 인간사회가 수천 년을 이어온 것을 보면, 이것은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모순적이게도 비교는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현일 때도 있어 보입니다. 내 아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 아이의 단점을 냉정히 파악하고 장점을 알아내려는 노력이 그중 하나죠. 저희는 과거의 저희가 어릴 때를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나은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부모는 늘 자신의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랑의 콩깍지가 씌어서 자신의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완벽한 아이로 보일 때도 있지만, 자신의 아이가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점도 있고, 거짓말도 하고 때로는 부모를 속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모가 인정할 때, 아이를 올바른 길로 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를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과 입 밖으로 꺼내어 아이 앞에서 비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엄친아 혹을 엄친딸이라고 부르는, 저희가 어려서 들었던 엄마 친구 아들/딸이나 엄마가 아는 사람의 아들/딸은 저희의 마음속에서 미움의 대상이 아니었나요? 그 아들/딸들은 모든 부분에서 완벽했고 언제나 모든 것이 쉽게 성취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고, 모든 점에서 타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엄마 친구 아들을 좋아할 수 없었고, 독자분들도 이 엄친딸/엄친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비교는 많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육아에는 규율 또는 훈육(discipline)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훈육은 자신이 싫어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연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좋아하는 것만 시키면서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아이가 그 훈육 속에서 별로 배우는 것 없이 그 과정에 대해 나쁜 기억만을 갖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을 다른 집의 아이 혹은 제 어렸을 때와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노력을 했지만 비교했을 것이 분명하긴 합니다). 특히 제게 존재하는 저의 어렸을 적은 저에게 많이 미화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제가 자라온 환경이 이이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불끈불끈 제 어렸을 때와 아이들을 비교하게 되었지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아이 둘을 서로 비교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제 아이들의 장단점이 명확하게 차이가 나고, 두 아이가 같은 상황에서 나타내는 반응이 다르고 행동의 결과가 명확히 차이가 나서 두 아이를 비교하고픈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제 자신을 조절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행동이 명확히 달라도 두 아이의 행동의 결과를 비교하여 두 아이 중 한 명 만을 혼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아이(사람)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행동을 혼내고, 어떤 것이 잘못되었고 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한참 지난 후, 아이들의 마음이 가라앉은 다음에 왜 다른 아이의 "선택"이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상황에서 더 좋은 선택이었는에 대해서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의 경우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실수를 더 줄일 수 있었기에, 막연히 아이들도 저와 같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러한 노력을 했습니다. 또한 잘한 아이에게는 어떤 점을 잘했는지를 정확하게 말하고 칭찬해 주고, 네가 이런 점에서 다른 형제보다 더 잘하니 상대의 모자란 부분을 보안해 주어야 한다고 말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선택이 좋은 선택이었는지, 그리고 제가 제 목표대로 잘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아이 "자신"과 "행동"을 분리해서 아빠가 자신의 인격을 혼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혼내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 주고, 서로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고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 협동해야 하는 존재로 키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저희의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아이의 성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아직까지도 아주 친하게 잘 지내고, 서로를 잘 도우면 자라주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느끼셨겠지만,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도 아니고 마음의 그릇도 크지 않아서, 아이가 잘못을 하면 마음에 담아놓지 않고 바로 혼내는 편입니다. 대신 잘못을 혼낸 후, 다시는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고 지나간 잘못을 끄집어내지는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잘못에 대해서 집중하지 과거의 잘못이나 다른 잘못과 뭉뚱그려서 혼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아빠의 꾸지람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아이의 감정을 혼란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어려서는 혼내고 나서 바로 안아주고 마음을 다독여주는 일을 바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혼자서 생각을 하고 자신이 잘못한 점을 인정하면 화해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특히나 아이가 어릴 때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혼내는 편이었습니다. 어려서 친구나 친척이 오거나 때로는 사람이 많은 야외에서 멋대로 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는데, 아이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는 부모가 혼내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악용한 것을 본 후로는 제 아이들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 혼내야 할 일이 있으면 바로 혼내는 편이었습니다. 이는 아빠는 어떤 상황에서도 혼낸다는 인식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들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제가 아이들의 체면을 너무 손상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추후에 다른 글에서 조금 더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아이를 혼낼 때, 늘 제가 세운 몇 가지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첫째는 제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혼내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스스로를 돌아봐서 지금 상황에서 감정을 조절할 자신이 없다면, 아이들에게 "아빠가 지금 매우 화가 나서 나 스스로를 조절할 자신이 없다, 이 얘기는 나중에 혼내겠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집사람은 제 이런 모습을 싫어해서 여러 번 다투기도 했지만, 제가 제 감정을 앞세워서 폭언을 하거나 또는 다른 행동을 한다면 제가 주는 훈육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 행동이 아이들에게 "아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다 뱉어도 괜찮구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될까 봐 무서웠습니다. 훈육이라는 것은 아이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아이에게 득이 되는 것보다 실이 되는 것이 더 많다면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까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제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것 같이 화가 나면, 저도 제 “생각의자”에 앉아서 제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를 스스로 관조했습니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깨달을 우스운 사실은 아이에게 화가 몹시 나는 제일 큰 이유는, 아이가 특별히 잘못을 해서라기보다는 제가 아이에게서 저 스스로에게 싫어하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때로는 저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혹은 알고 있었던 제 행동의 미운털을 아이에게서 발견한 순간 저 스스로를 향한 노여움이 아이를 덮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로 인해서 제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마 제가 모자란 부분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가 저의 거울이듯이, 제 아이들 또한 저에게 자신의 행동을 비추어 가면서 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비추는 그 거울이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이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다면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제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늘 강정을 절제한 상태로 살아가기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만한 인간으로서 안정정인 감정을 갖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저는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늘 말합니다. "아빠가 최고의 아빠가 아니어서, 부족함이 많은 아빠라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아빠는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가끔은 아이들에게 말해줍니다. "난 너희들의 완벽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노력하는 모습을 칭찬하며 너희 그 자체를 사랑한다고." 전 아이들에게 행동으로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늘 노력해야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족한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행복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아이들은 혼낼 때, 아이가 그 잘못을 인정하는지 잘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만약 아이의 행동이 잘못되었더라도, 아이가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저는 그 훈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존 이 전재는 아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이가 자신을 생각을 말한 것으로 혼을 내지 말아야겠죠. 아이가 아빠는 어떤 얘기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아이는 솔직히 흉금을 털어놓지 않을 것이며, 이 훈육의 노력은 단지 제 가치관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에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체벌의 아픔을 피하거나 또는 몇 시간 동안의 훈육이라는 미명하에 일어나는 고문을 벗어나기 위해 동의하는 척을 했을 뿐, 그러한 훈육 후에도 제 행동을 수정하거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하고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아이에게도 그것이 왜 잘못인지 충분히 이해를 시킨 후 혼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셋째로는 혼내는 과정에서 반성 (reflection), 격리(isolation)와 분리(separation)를 사용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의 인격 와 그 잘못을 따로 떨어뜨려서(separation) 아이의 인격이나 자아를 혼내는 것이 아닌 그 행동을 혼내는 것임을 명확히 하려고 했고, 지금 혼내는 잘못을 다른 잘못과 분리시켜서 (isolation) 어떤 잘못으로 혼나는 것인지를 아이가 혼동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혼날 때 어떤 사건으로 어떤 이유로 혼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아이가 스스로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비추어 (reflection), 그 행동을 반성하도록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과정이 아이가 커가면서도 자신의 인격을 발달시키는데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과정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네 번째로, 사과를 하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는 아이들이 제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필요할 때 사과를 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것이 체면을 아는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아이들을 잘못 혼내거나, 오해했거나, 제가 잘못을 했을 때, 아이들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나 자신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 용서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며, 나는 너희들이 용기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늘 얘기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수다쟁이 아빠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아빠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이고,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고 얘기해 주어서, 전 그것이 참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