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평범
저는 어려서 ‘얄개시대’라는 청춘물 영화를 즐겨보곤 했습니다. 아마 요즘분들은 잘 모르시는 영화겠지만 제가 어려서는 상당히 유명했던 시리즈물 청춘영화였습니다. 그중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얄개의 친구들 중 “아담”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입니다. 맨 처음 이 친구가 소개되었을 땐, 이 친구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어서 아담과 이브에 나오는 아담이 별명이 되었다보다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친구의 꿈이 “나중에 커서 아담한 마당을 가진 아담한 집에서 아담한 아내와 아담한 아이들과 아담하게 사는 것”이었기 대문에 이러한 별명이 붙은 것이었죠. 아주 쉽게 말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이 친구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볼 때는 어렸었기에,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꿈을 가져야지, 참 나약한 꿈을 가진, 모두들 쉽게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점차 들면서 보니 그가 가진 꿈은 어쩌면 유명하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범이란 무엇일까요? 보통 평범이란 얘기를 들으면 '중간'이란 단어가 연상됩니다.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은 사람들의 중간에 있는 것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대다수에 속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주위에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럼 저희가 보통 말하는 "평범한 삶"은 사람들의 많은 삶 중 중간쯤에 위치한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중간은 45-55%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40-60%을 뜻하는 말일까요? 만약 40.0%가 그 두 가지를 가르는 경계라면 39.9%에 위치한 사람은 평범하지 않을까요? 만약 저희가 사람들의 정확하게 50%의 위치에 있다면, 저희는 난 정말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 순위는 몇 가지 인지들로 결정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모든 인자들이 다 50%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각 인자의 평균이 50%쯤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돈이나 집의 평수같이 쉽게 정량할 수 없는, 사람의 능력과 성품, 건강, 사회적 지위의 중간은 어디쯤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평범이 과반수 이상이 포함되어 있는 그룹을 말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강을 예로 들어보지요. 좀 지난 연구이긴 하지만, 제3기 국민영양조사(2005)에 따르면 한국의 60세 이상의 인구 중 50% 이상이 고혈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70세쯤 되어서는 고혈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이란 것인데,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매일 약을 먹고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이 자신이 ‘평범’한 또는 ‘아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생각보다 평범이란 말이 정말 대다수에 속하거나, 그저 막연한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저의 말에 동의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저희가 평범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중간이라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만족’이라는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평범함이란 자신의 마음 그릇의 크기에 적당히 차있는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남과 비교했을 때, 적당히 만족할 수 있을 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족'으로 평범함을 정의할 때, 저희의 마음 혹은 욕심 그릇의 크기와 '적당한' 만큼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를 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아담이의 예로 돌아가보죠. 혹시 아담한 집은 내가 생각할 때, 크지는 않지만 너무 작지도 않아서 내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고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서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젊은 사람이라면 중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아담한 아내는 신문에 날만큼 뛰어나지는 않지만 어디에서도 어깨를 으쓱할 수 있는 좋은 사회적 지위와 외모를 가진, 그래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닐까요? 사람마다 차이가 나겠지만, 저희가 보통 말하는 평범은 실제로 전혀 평범하지 않은 남보다 위에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말하던 수많은 어른들이 아이게게 전혀 평범하지 않은 기대를 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대학을 갈 때는, 100만 명 정도의 수험생이 학력고사를 보고, 15만 명 정도의 학생들이 4년제 대학에 갔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보통 서울 안에 있는 4년제 대학에 '평범'하게 들어가길 기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학생들이 주위의 그 평범한 엄마 친구 아들/딸 혹은 아빠 친구 아들/딸과 비교를 당하는 고통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평범하지 않고 비범한 아들/딸들과 비교를 당하면서 한 번쯤은 참담한 마음과 좌절감을 최소 한 번쯤을 느껴보시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저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 전에, '평범'과 같이 애매만 표현이 아닌, 제가 정확하게 아이게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그것을 제가 이해하고 있어야 아이와 저의 삶을 가지런히 맞춰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는 저의 20대를 가로지르던 화두였습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면 제 삶의 많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 삶에서 한 가지씩 지워 나가면서 그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권력, 돈, 명예, 건강, 그 수많은 것들 중에 저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엇이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 전 저는 다시 스스로에게 아이가 "어떤 아이로 크면 좋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제가 스스로에게 한 답변은 두 가지였습니다: 행복한 사람(자녀가 아니라 사람)으로 키워야 하겠다. 그리고 나의 삶보다 더 편안한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답을 결정하고 나서, 내 아이가 행복하게 크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삶과 비교당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는 꽤 암기력이 좋았고 공부도 잘했지만, 일 년에 한 달여는 학교를 빼먹어야만 할 정도로 많은 병치레를 했고 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에 버거웠던 저는, 학교가 끝난 후 논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기 때문에, 어려서는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그 많은 시간을 혼자서 책을 보며 지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책으로 배웠고, 또 별로 평범하지 못한 성품과 가정환경을 가졌던 저는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어렴풋 하지만 초등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남들이 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남들과의 벽을 허무는 방법을 혼자서 배우지 못했고, 남들이 왜 나를 자신들과 다르다고 느끼고 껄끄럽게 여기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타인이 저에게 느끼는 껄끄러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남의 다름을 어려워하는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받아들여지지 못함을 남에 대한 미움으로는 발전시키지 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아이는 아빠가 아이를 아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 준다는 것을 알고 믿으면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행복해지려면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받아들여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자존감이 높아지고 어떤 일을 하던 행복해질 수 있기 믿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말했습니다. 저기 구부러지고 가시가 나고 몸통이 구부러져 있어서 아무런 사용처가 없어 천년을 사는 나무와 곧게 자라고 큰 몸통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베어지고 쓰이는 나무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나무냐고요? 사람에게 소용이 있다고 해서 곧은 나무가 더 좋은 나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이기심에 가깝지 않나고, 우리가 아닌 나무의 행복을 우리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장자는 우리가 타인의 쓰임과 옳음과 행복을 정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의 도(제 관점에서는 '행복')를 이루는데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저는 나무가 더 좋은 나무이기 위해서는 그 나무 스스로가 자기의 쓰임과 자기의 삶을 목적을 이해하고, 목표를 정했을 때만 좋은 나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목적과 목표가 자신의 본질과 가까워야 그 꿈을 일룰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기 때문입니다. 만약 버드나무가 자작나무의 생김과 용처와 목적을 자신의 삶의 목적이라고 여긴다고 해도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루려고 들인 노력이 또 다른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 생각은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자신의 쓰임과 목적을 정했고 그를 이루기 위해 노력을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가능성은 적고 또한 어려운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늘 합리적인 결정만은 하지 못하고, 또 모든 사람은 다르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제가 아이게게 해 주어야 할 일은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성품을 발현하도록 도와주며,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관찰하고, 그 아이가 자신의 쓰임과 목적을 잘 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울타리를 쳐놓고 아이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게 도와주는 것이죠. 아 물론 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안에서 자유로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