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푸코, 사이코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번역한 역자는 번역을 마치고 에코, 푸코, 사이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박식하고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는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번역했던 역자는 에코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은 많은 뒷 이야기들을 독자를 위해서 일일이 조사하고 설명해야 했으며, 그 책의 두께만큼이나 긴 역주를 작성했야 했습니다. 그 역주를 읽으면서 힘겹게 읽었던 책으로 제 기억에 강하게 남은 책입니다. 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역자는 에코는 독자들이 책의 서론을 읽을 정도의 지식과 호흡이 되어야 자기의 책을 읽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악몽 같은 책의 앞부분을 돌파하고 나서는 책을 읽기가 점점 더 수월해졌죠. 마치 두뇌를 연습하여 저자의 빠른 발걸음을 조금 더 쉽게 맞출 수 있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글이 어렵지도 그렇다고 읽는데 많은 지식을 요구하지도 않지만, 혹시라도 제 글에 과도한 기대를 가지실지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쓰고자 하는 이 글의 눈높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기대감이 너무 크시면 실망하실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어떤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지를 독자분들과 같은 호흡으로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혹시 이 글을 읽고 실망하실 분들에게 "내가 아까 말했잖아"라고 핑곗거리를 대기 위해서 '보험'을 들어놓는 글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글렌다는 케이시에게 점심과 함께 우유 한잔을 주었습니다. 케이시는 그 우유잔을 보고 도끼눈을 떴죠. “난 이 잔이 싫어!” 글렌다는 매우 짜증이 나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아들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습니다. “만약 다른 잔으로 바꾸고 싶다면, 새로운 잔을 갖기 위해 뭘 해야 할까?” 하지만 불행히도, 캐이시는 별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죠. 그래서 “손이 닿지 않아”라고 징징거리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글렌다는 “음, 그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말이 케이시의 상상력을 작동케 했습니다. 그는 징징거리는 것을 멈추고 생각을 시작했죠. “기어 올라가서 가져올까?”
글렌다는 “그건 안전하지 않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습니다. "잔들을 이 찬장의 맨 아래에 놓으면 어떨까?”
케이시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채, “좋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몇 분도 안되어 케이시가 골라준 세 개의 잔을 맨 아래의 찬장에다 정리를 해 놓았습니다. 케이시가 한 개의 잔을 골랐고 식탁에 가져간 후 자랑스러운 얼굴로 이전의 잔에서 새로운 잔으로 우유를 옮겨 부었죠 (그 과정에서 몇 개의 우유 웅덩이를 만들었고요).
짜증을 내는 대신에, 글렌다는 한번 더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케이시가 우유 몇 모금을 즐길 때까지 기다린 후에, “조금 흘렸네. 이 흘린 우유를 치우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케이시는 자신의 능력이 매우 출중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케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싱크대 아래에 있는 스펀지를 가져와서 그 흘린 우유를 닦았죠. 그리고 그 스펀지는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글렌다는 케이시가 아직도 이 과정에 아직도 잘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스펀지에 대한 수업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케이시는 오늘 행복해 보였고 아직도 흥미로움을 잃지 않아 보였죠. 그래서 글랜다는 물었다 “너 우리가 우유를 스펀지 안에 그대로 두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케이시는 스펀지를 자세히 봤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챌 수가 없었습니다. 케이시는 엄마에게 물었죠, “뭐가 일어나는데?”
글랜다는 설명했죠, “안에 있는 우유가 상하고 스펀지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게 만들어!” "고약한 냄새"라는 단어는 케이시가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케이시는 이제 글랜다에게 완전히 집중했습니다. “스펀지를 싱크대에서 잘 헹궈서 다 마르면 아까처럼 싱크대 아래에 넣어나야 해. 스펀지 물로 헹구는 거 연습해 볼래?”
케이시는 물을 가지고 놀 기회라면 놓칠 수 없었습니다. 글랜다는 어떻게 비틀어서 스펀지를 쥐어짜는지 보여줬어요. 그리고 케이시는 그의 작은 의자에 올라가 서서 그 스펀지를 헹구는데 즐거운 15분을 보냈죠.”
(다음은 Jane Nelsen, Cheryl Erwin와 Roslyn Ann Duffy가 쓴 “긍정적인 훈육 (Positive Discipline)”의 11장 칭찬의 기술( The Art of Encouragement)에서 발췌)
육아책을 읽으면 이런 글랜다 같은 엄마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늘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이런 책들에 나오는 글랜다와 같은 엄마나 아빠가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참 아이를 잘 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럽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런데 "내가 이러한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제 대답은 "아니, 난 못해"였습니다. 이러한 방법들을 배우고 아는 것은 큰 힘이 될 것이고 몇몇 지식은 실제로 저에게도 큰 힘이 도움이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제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아이를 이렇게 키우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리고 이런 내용을 기대하시는 분이라면 죄송하지만 제 글은 도움이 되지 않으실 겁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아이가 어려서 저런 내용을 읽을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참 좋은 양육방식이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은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우리 두 부부가 인내를 가지고 매번 똑같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만약 저희 부부가 아이에게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저렇게 행동하고 힘들고 피곤할 때는 짜증과 약간의 언어폭력이 섞인 반응으로 대한다면 그것이 정말 좋은 방법일지, 그리고 그러한 극적인 반응이 정말 아이에게 좋은 훈육일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훈육 방법이라도 부모의 역량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뱁새가 황새를 따라 하다가 가랑이만 찢어지는 참사가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 합리화 과정도 이루어졌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화도 났습니다. 부모의 체력은 늘 한계가 있고 집안일이며 바깥일이며 정말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특히나 외국에 살면서 부모나 친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이에게라도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참 작아지더군요.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아이에게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완벽한 부모이야기를 읽으면 마치 엄마 친구 아들에게 비교당하는 듯한 -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당하는 듯한 - 그런 마음이 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를 키울 때, 저희 능력에 맞춰서 규칙적이고 일관된 반응을 주려고 생각했습니다. 한 시간은 100점짜리 부모 또 다른 한 시간은 10점짜리 부모가 아니라 60점짜리 부모일지언정 제 모자람을 아이에게 인정하고, 일관된 반응을 보여주면서 아이와 같이 커나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아이를 낳기 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이가 매우 어렸을 때, 저희의 육체적인 능력과 마음 그릇의 크기를 인정하고 빨리 계획을 수정해서 운 좋게 제가 정한 방향대로 육아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글은 아이가 별 것 아닌 것에 투정하면 혼내기도 하고, 아이가 우유를 흘리면 소리도 지르는 그런 평범한 아빠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모범적인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진즉 깨닫고, 규칙적인 편법으로 육아를 한 평범한 아빠의 아이 키우기 이야기들로 채워질 것이지, 이런 교과서에 나올만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몇몇 분에게는 저렇게 엉망으로 키워도 그렇게 잘못 자라지 않는구나 하는 위안을 주는, 조그만 반창고가 되고 싶은 글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에게는 저런 방법을 써서 아이랑 친해질 수 있었구나, 나도 한번 해봐야지 하는 아이디어들을 드리면 기쁘겠다는 생각에 쓴 글들입니다. 이 글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제가 배운 것들, 제가 후회하는 것들, 그리고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꼭 지키려고 했던 고민 끝에 만들어 내었던 혼자만의 규칙들, 그리고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누고 더 가다듬고자 쓰는 글입니다.
제 글들은 제가 적기에 아빠의 생각과 이야기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육아는 아빠의 혼자만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보통의 경우 아이와 시간을 더 많이 보이는 엄마의 역할이 육아에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게도) 출판된 많은 육아서적들이 엄마를 위해서 쓰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의 균형 잡힌 육아를 위해서는 엄마와 아빠의 육아 역할이 달라야 한다고 믿고, 특히나 이는 대가족 사회에서 여러 가지 역할들을 배울 수 있었던 과거에 비해 핵가족환 된 현대의 가족들에게는 더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빠에 대한 도움서나, 다른 아빠들로부터 육아에 대한 지식을 얻기는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저는 아빠가 엄마에 비해서 육아에서 두 가지 이점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아이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기가 더 편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특히 아이가 어릴 때) 아이의 생명과 직결된 음식과 옷, 배변활동을 도와주는 엄마는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진 아이로 자라날 수 있다고 하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엄마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아빠의 경우는 아이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기가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을 통해서 아이는 간접적인 사회경험을 하게 되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추후 조직생활이나 학교생활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아에 조건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같이 주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아이가 충분히 나이가 들어서 두 가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를 말합니다. 너무 어린아이에게는 오히려 혼동과 불안감만 가중시키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 남성이 엄마보다 이 역할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아빠가 아이에게 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기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아빠와 엄마가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육아가 매우 고된 일이고 그 고된 일을 장시간 하게 되는 엄마는 아이에게 일관된 반응을 보여주기가 힘들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 의하면 엄마들이 아이에게 측은지심을 더 쉽게 느껴서 엄마들이 아이에게 엄격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도 많고, 육아에 지쳐서 마음에 휴식을 찾고자 자기가 정한 규칙을 깨고 허락을 해주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적은, 육아노동에 덜 지친 아빠들은 아이에게 일관된 반응을 보여주기가 비교적 쉬워 보입니다.
기우에서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의 얘기가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정답에 근접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아이를 키우면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거나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의 예시로 참고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입니다. 아이와 신용을 쌓기 위해 노력한 한 아빠의 노력들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제 부족한 모습을 보시고 아 저렇게 육아를 못하는 사람도 아이와 저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구나 하고 위안을 느끼는 분도 있으실 테고, 또는 무릎은 탁 치시면서 저 사람은 이러한 고민을 이렇게 해결했구나 하는 분도 있으실 테고,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있었네 하면서 신기해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모 중 한 사람의 노력으로 육아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부도 많은 생각을 하고, 대화를 통해서 육아의 방향을 결정하고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 가며 그 방향으로 한결같이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잘 따라주었고, 이제까지 큰 문제없이 자라 주었습니다. 우리가 불완전하고 우리의 아이들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두 부모가 많은 노력을 해도 때로는 아이가 그 노력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희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제 모자람이 몇몇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과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