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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마드 노을 Jul 31. 2024

항상 휴일인 백수가 굳이 휴가를 떠난 사정



 매일이 휴일인 백수의 휴가 


나는 퇴사기간이 길어지면서 숨 막힐 것 같은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상 진이 빠지고 힘이 없어서 기운이 졸졸 세는 밑 빠진 독이 된 것 같았다.

매사에 재밌는 것도 신기한 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는 큰일 나겠다 싶어서 매일을 휴일처럼 살고 있는 백수임에도 불구하고, 없는 살림에 이 돈 저 돈 닥닥 긁어모아서 휴가를 가게 되었다.



주머니는 가볍지만 비행기는 타고 싶었기에 저렴한 비행기삯을 지불하고 해외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언제든지 한식을 먹을 수 있는 제주도로 향했다.

지겨워진 일상을 떠나 전환이 필요했고 없는 힘을 쥐어짜서 여행지를 다니고 싶지 않아서 관광은 하나도 넣지 않았다. 호텔에서 헬스하고 수영하고 TV를 보며 최대한 게으르게 지냈다. 호텔반경 2km 안에 있는 마트와 맛집방문, 공원산책정도가 외부 일정의 전부였고, 노트북도 가져가지 않았다.






 2만 원으로 신이 될 수 있는 제주비행기 


여유로운 일정 때문인지,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공항에 가고 비행기를 타는 자체만으로 너무 좋았다.

오랜만에 공항의 공기를 들이마시자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바짝 메말라있던 감흥이 살짝 일렁인다.

전 세계 바이러스의 집합소이며 환기도 안 되는 공항의 탁한 공기로 답답함이 좀 해소되는 걸 보면 장소의 힘은 새삼 대단하다.



비행기를 타고 평소 발을 딛고 서있는 땅이 아닌 하늘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다.

아래서 올려다봤을 땐 거대하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사소해지고, 지겹고 짜증 났던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살던 곳이 이렇게 멋졌나 싶어 새삼 놀랍다.

갖고 싶었던 자동차며 아파트와 땅, 이 모든 것들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멋진 풍경의 일부로 귀의해버린다.

나의 욕심을 발아래 두고, 사람의 영역을 잠시 벗어나 위대한 관찰자가 되어본다.

제주항공권은 편도 2만 원 때로 얻을 수 있으니 가성비 넘치는 현대판 신체험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수많은 아파트를 발아래 둔 기분이 썩 괜찮다. 복작거리는 세상사도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별게 아니다.




 살고 싶어서 느꼈던 권태, 그 염증에 대한 처방전 


난기류를 만나서 비행기가 흔들릴 때면 '하느님 부처님 신이시여, 제발 살려주세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놀이기구도 무서워하는 나는, 잠시 신체험을 하다가 바로 사람으로 돌아온다.

사는 것에 그다지 큰 흥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두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꼭 쥐고 무사도착을 기원하는 걸 보면

그동안 느꼈던 권태는 잘살고 싶다는 열망의 반증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땅에서 볼 땐 손에 잡힐 것 같았던 구름은 비행기에서 만나면 그냥 수증기 덩어리임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우러르는 것들이 실제로는 내 생각과 다르거나 허상인 것들도 많다.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땅 위에서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내가 접하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봤던 순간이 권태라는 염증을 완화시키는 처방전이 되었다.


수증기처럼 흩어져버렸던 내 하루하루를 다르게 맞이할 수 있었던 꿀 같은 휴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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