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관계가 좁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걸 선호하지 않는 '아싸'이기 때문에 핸드폰 전화진동이 울리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11년 다닌 회사에서 퇴사 한 이후에는 전화진동이 울리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진동기능이 고장 나지 않았나 의심될 때쯤 생존신고하듯 한 번씩 애써 울리곤 했다.
직장인 일 땐 회사에서 오는 전화가 너무 싫었다. 퇴근한 후에 오는 전화에는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신경이 곤두섰고, 휴가 중에 오는 전화는 벗어날 수 없는 노예 신분을 뇌새김질하게 했다.
퇴사한 지 5개월이 넘어가는데도 예전회사의 상위책임자분께 가끔 전화가 온다. 어떻게 지내냐, 뭐 하고 지내냐라고 물으셨고 잘 지낸다, 그냥 있다고 하나마나한 대답을 뭉뚱그렸다. '저 퇴사하고도 전. 혀. 아쉬운 거 없이 잘 지내거든요?'라고 말하듯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한 번은 받았는데, 두 번째부터는 받기가 싫어졌다.
"안 받아도 돼, 노을아!"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따라 그냥 받지 않았다.
오예 와우 이게 퇴사의 맛이지! 으하하! 하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이런 건가 싶어서 꽤나 통쾌했다. 늘 나에게 업무지시를 하고, 술마시길 강요하던 상사의 전화를 쌩까도 되다니! 이젠 받기 싫었던 업무 전화가 걸려 올 일도 없고, 억지로 받을 의무도 없어졌다.
나는 항상 이성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었다. 무표정 이성은 적당히 예의 있는 자세와 기계적이고 친절한 목소리를 타이핑해 냈고, 실수 없이 빠르게 일할 수 있도록 과속페달을 미친듯 밟아댔다.
'야 너 표정관리 좀 해. 열받은 거 다 티 나거든 지금?'
'네...'
회사에선 이성이 감정의 주인 노릇을 했고, 감정은 이성의 명령에 힘없이 대답을 오물거렸다. 감정은 항상 힘들어했으며, 이성은 그런 감정을 백안시하며 다그쳤다. 엄마에게 혼나는 손주를 감싸는 할머니처럼, 나는 항상 감정을 끌어안고 달래주기 바빴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과도한 업무에 체력의 한계를 느꼈고, 앞이 보이지 않는 회사생활에 지쳐갔다.
결국 감정의 혈관은 터져버렸고, 쓰러지듯 사표를 냈다. '퇴사하고 뭐 하고 살 건데? 잘할 수 있어?'라고 항상 겁을 주던 이성도 너덜하게 죽어가는 감정을 모른척할 수 없었기에 퇴사를 받아들였다. 오래는 못 다니겠다, 그만하고 싶다는 불안감이 전조증상처럼 항상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었다. 결국 인내심은 자정기능을 잃었다.
퇴사 이후의 삶이 마냥 파라다이스는 아니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받고 싶지 않은 전화를 쌩깔 수 있는 '자유'는 막히고 터졌던 감정의 혈관을 아물게 했다. 다시 따뜻한 피가 흘렀고 이성과 감정, 인내심 모든 것들이 정상수치로 돌아왔다.
모든 상처가 완전히 아문건 아니었지만 나를 짓눌렀던 저릿함이 없어졌기에 내 힘으로 조금씩 걸어 나갈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혈관을 막는 일이 아니라 심장에 산소를 공급해 주는 일을 하고 싶다. 나의 심장에 뛰게 하며 온몸을 편안하게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