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맥주
나는 여행 내내 한인민박에서 머물렀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행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여행에서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기에 여성전용 한인민박을 예약했다.
내가 런던에 있었을 땐 저녁 10시는 넘어야 해가 졌다. 그래서 8시쯤 귀가를 했더니 숙소엔 아무도 없고 스탭분만 계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탭분과 오늘은 뭘 했고 여행은 어떤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펍은 가볼 거냐는 질문에 나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마시는 게 맥주랑 와인이다. 스탭분이 영국에 오면 펍은 무조건 가야 하고 펍에선 흑맥주를 꼭 마셔야 한다고 하셨다. 예전에 한국 펍에서 흑맥주를 한번 마셔본 적이 있다. 내가 이제껏 마셔본 맥주 중에 정말 최악이었다. 그래서 흑맥주 이야기를 듣고는 절대 안 마실 거라고 했다. 그랬더니 스탭분이 "저도 흑맥주 싫어했는데 영국에서 마신 흑맥주는 한국이랑 맛이 전혀 달라요! 꼭 먹어봐야 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반신반의 상태로 스탭분과 함께 펍에 갔다. 후기를 말하자면.. 영국 여행을 간다면 펍엔 꼭 가 보길 바라고 흑맥주는 꼭 마셔보길 바란다. 맥주가 정말 맛있고 깔끔하며 맥주 특유의 비린내와 시간이 지나면 나는 쓴맛이 시간이 지나도 나지 않았다. 스탭분이 아니었다면 영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 맛있는 맛을 몰랐겠지? 펍에 갈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먼저 같이 가자고 여쭤봐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맥주를 마시면서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대화에서는 빠질 수 없는 mbti부터 시작해서 이상형 이야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살짝의 고민까지.
내가 사는 곳은 시골이라 식당, 카페, 가는 곳 모두 한정적이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가는 곳만 가게 되어 일상이 너무나도 지루했다. 그래서 나는 여행 중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스탭분과의 짧았던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기억에 남는다.
스탭분이 맥주를 마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래 저는 숙소에 묵는 분들이랑은 사적으로 어딜 가거나 그러지 않는데 아까 대화를 잠깐 하다가 친해지고 싶어서 같이 맥주 마시러 가자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감사했다. 긴장을 많이 했던 여행의 첫날, 숙소 스탭분 덕에 자신감이 생겼고 그 덕에 나만의 여행을 잘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지 못했고, 영국을 떠나는 날 카톡 대화방을 나가버려서 연락할 방법이 없어졌다. 한국에 와서야 아차 싶었다. 부디 그분을 다시 뵙고 싶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시는지도 모르지만 이 글을 스쳐 지나가며 읽으셨으면 좋겠다.
나는 일회성 만남에 기대가 있었다. 상대는 나를 모르고, 나도 상대를 모르기에 겉으론 가볍지만 무거운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는..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는 그런 만남. 어쩌면 나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 같다.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에 두려움은커녕 기대가 되었다. 그만큼 난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늘 다리에 힘을 주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저 누군가의 딸도, 친구도, 동생도, 선배도 아닌 그냥 '효정' 나 자신이 되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고 그런 바람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