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팝니다

엄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by 이경원

엄마, 엄마를 팔기로 결심했어. 무슨 소리냐고 의아하겠지? 구십 살 노인네를 어디에 팔 것이며, 설령 판다고 한들 사겠다는 이가 있기나 할까? 더구나 치매 중증 단계에 접어들어 사람도 못 알아보고, 코앞의 화장실에 가는 것도 누군가의 부축이 없으면 어려운 사람인데.

그런데 그게 내가 엄마를 팔려는 이유야.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파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나도 그래볼까 해. 엄마를 팔아서 작가 소리 들어보려고.


엄마는 가끔 ‘내 얘기를 글로 풀면 소설 서너 권은 나올 거다.’라고 말했었잖아. 엄마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는 모두 기막힌 소설이 된다고 생각할 거야. 나도 그렇고.

엄마의 인생이 원만하지 않았다는 거 알지만, 지금 정말 가장 기막힌 건 내 인생이야. 엄마도 알잖아. 아니 어쩌면 모를 수도 있으려나? 내가 요즘 갱년기라 사는 게 참 허무하거든.

설상가상으로 엄마까지 치매라고 하니까 누구한테 인지도 모르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지금 내 상태도 당황스러운데 엄마의 치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이런 건 미리 배운 적도 없고, 내 인생 계획표에 엄마의 치매는 들어있지도 않거든. 내 삶은 그저 평온하게 내 위주로 돌아가리라 낙관적으로 지내다가 복병을 만난 기분이야.


사실 엄마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건 오 년 전쯤 될 거야. 엄마가 치매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모르는 척 시간을 보낸 거지.

그때 오 년 전 말이야. 아버지 모신 납골 공원에 가던 날. 엄마는 아침부터 두부며 전을 부쳐서 플라스틱 삼단 도시락에 차곡차곡 담았어. 납골 공원으로 가는 동안 엄마는 그 도시락을 팔걸이 삼아 자동차 뒷좌석에 깊숙이 기대앉아서 한잠 달게 자기도 했잖아. 차창 안으로 들어온 햇살에 눈이 시렸는지, 손등으로 햇빛을 막고 바로 앉으며 창밖을 내다봤잖아.


‘아직 멀었느냐?’고 물을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어. 납골 공원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내 가슴을 벌렁 이게 만들었지 엄마가.

“여기가 어딘데 이렇게 꽃이 많냐?”

“아이고~~ 곱기도 하다.”

그때까지 나는 나대로 차창 밖으로 밀리는 풍경을 보면서 경치가 뒤로 밀리듯 나의 인생도 밀려가는 게 아닐까? 하는 철학적이라면 철학적인 생각에 깊이 빠져있었다고.


계절이 바뀌면 꽃들이 차례대로 피어나듯 인간의 계절에도 순서에 따라 피어날 꽃이 분명 있을 텐데, 갱년기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이길래 이렇게 우울하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까?

이렇게 바리바리 음식 만들어 갖고 가서 절 한 번 하면 아버지가 알까? 이런 게 소용이 있기는 할까? 하여튼 그때 내 심정은 모든 게 다 의미 없게 느껴졌었어. 그러니 엄마가 갑자기 ‘여기 어디냐?’고 묻는데 내가 얼마나 놀랬겠어?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니까 그랬겠지. 엄마는 계속 꽃구경에 정신 팔려있었잖아.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거만하고 우아한 목련꽃 아래, 마치 봄 소풍 나온 새색시 같은 표정으로 좋아하던 엄마를, 내가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 엄마는 모르지?

내가 확인하듯 엄마 손 잡고 물었을 때 흔들리던 엄마 눈빛에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알아?

“엄마 아버지 보러 와서 좋아?”

“으응? 어디라고?”

베였는지 모르고 지낼 때는 아픈 줄 모르다가, 피가 나는 것을 알아채면 아프기 시작하는 것처럼, 이제는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네.


나는 ‘갱년기’를 핑계 삼아 꾀부릴 생각이었거든. 왜 그거 있잖아. 아프면 떼쓰거나 어리광 부리는 게 용서되기도 하잖아. 나도 그럴 셈이었지. 시간의 신에게 ‘지금 내가 아프니 생을 잠시 방관하더라도 좀 봐달라’고.

신은 냉정하더라 등짝을 한 대 때리듯 엄마에게 치매란 병을 주고 시간은 붙들어 둘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네. 엄마와의 시간도 언제까지 계속될 수 없다고 협박하면서.


요즘 나는 엄마를 관찰해. 앙리 바르뷔스란 작가의 ‘지옥’이란 작품을 보면, 주인공은 호텔에서 자신의 방에 난 작은 구멍으로 옆방을 훔쳐봐. 매일 그 구멍으로 옆방에 묶고 가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내용인 소설이야.

나는 대놓고 엄마를 관찰해. 관찰한다는 표현이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엄마 딸의 표현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이해해 줘.


엄마를 관찰하면서 내가 ‘인간을 이해’했다거나 ‘나를 알았다’고 하는 얘기가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삶이란 거창하게 보여도 들여다보면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걸 엄마를 보면서 알았거든. 그리고 엄마와 지내면서 내 갱년기를 잊었어. 신기하지?

아직도 삶을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정신이지만 확실하게 알아낸 게 하나 있어. ‘시간’에 대한 것 말이야. 시간은 명약이 분명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명약이 될 수도,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안 것 같아.

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 이 시간도 성실하게 채워가는 엄마가 존경스러워서. 엄마를 판다는 핑계로 자랑하려고 해. 그러니까 엄마 내 곁에 오래 있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