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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Oct 14. 2023

빨간 웃도리

"아이고~ 에이, 저런.. 쯧쯧"

"아이코 들어갔다! 잘했네, 잘했어"

골프 중계방송 삼매경에 빠진 엄마의 탄식과 감탄이 어우러진 소리다.

점차 약해지던 청력이 아주 사라졌는지  엄마는 웬만한 소리는 이제 전혀 듣질 못한다. 그러면서 엄마의 취미가 바뀌었다. 이전에는 드라마나 뉴스를 주로 봤는데 귀가 안 들리면서부터 슬그머니 골프 방송을 즐겨 보게 됐다.

멋지게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따라 엄마의 머리가 함께 움직인다. 하얀 공이 그린에서 구르다 홀로 빨려들 듯 떨어지면 경기장의 갤러리처럼 박수를 치기도 한다. 들리지 않아도 공의 움직임을 보면서 경기에 몰입한 엄마는 긴 시간 꼼작 않고 TV앞을 떠나지 않는다.


엄마가 골프 방송에 심취한 이유는 날아가거나 구르는 공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그보다 엄마를 더 흥분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를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엄마가 타아거 우즈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유명한 골프선수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엄마에게 타이거 우즈는 그저 '빨간 웃도리 입은 사람'이다.

"저이 나왔다! 저이는 볼 때마다 내가 최고라고 한다."

광고 속 타이거 우즈가 자신이 광고하는 골프공이 '최고'라고 엄지를 들어 올리며 웃는 모습을 보면 엄마는 화면 속 인물이 자신에게 하는 칭찬인 줄 알고 좋아한다.

"아이고 그래요! 내가 최고예요! 아유~ 고마워라!"

엄마는 호호호 수줍게 웃으며 고맙다고 TV 속 타이거 우즈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다. 그런 엄마를 곁에서 보고 있으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칭찬은 엄마를 웃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이토록 환하게,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도 같다.


" 저이는 옷이 저거뿐이 없나? 볼 때마다 빨간 옷만 입고 나와."

"빨간 웃도리 입으면 공이 잘 맞아서 빨간 웃도리만 입는대."

"그래? 근데 저거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를? 골프? 저렇게 멀리 공을 날릴 수 있으려나?"

"가만히 보니까 별거 아니던데 뭘. 그냥 공 굴려서 구멍에 넣었다가 다시 빼내면 되는 거 아냐? 그건 나도 할 수 있겠다."

"저렇게 한 번에 굴려서 구멍에 넣으려면 처음에 공을 멀리 쳐 보내야 하는 데 엄만 힘없어서 멀리 못 보낼걸?"

"저런 애들 장난 같은 것도 시합을 하는 거냐?"

엄만 엄마가 본 그린 위에서의 상황만 생각하고 묻는다.

"그럼, 상금도 많이 주고 우승 트로피도 주는데!"

"그거 주전가 같이 생긴 거?"

엄마는 우승 트로피를 '주전자'라고 한다. 하긴 생긴 모양이 비슷 하긴 하다. 

"응 주전자도 줘!" 

"저기다 물 담아 먹을 수도 있는 거야?"

엄마는 정말 진지하게 묻는다.

"저 주전자엔 물 대신 돈 담아서 줄 걸"

설명이 길어지면 생각이 뒤섞이는 엄마를 위해 되도록 짧게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가끔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 엉뚱한 말을 할 때도 있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공을 치는구나"


"아유~ 저이 또 나왔다. 근데 저이는 요즘 공을 안 치나 보더라. 다른 사람들 공치는 것만 나와."

잠깐 광고가 나오는 사이 이번엔 타이거 우즈의 근황이 궁금한 엄마.

"저이는 다쳐서 지금 치료 중이래."

"그럼 병원에 있대? 아까 잠깐 보이던데...."

"응, 잠깐 나왔대. 또 엄마한테 최고라고 하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주스라도 한 병 사다 줘라. 나한테 매일 최고라고 해주는 이가 저이뿐이 없구만."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다 끝내지도 않고 어느 병원이냐고 내게 눈으로 묻는다.

"병원이 미국에 있어서 못 가"

"그럼 그 먼 데서 여길 온 거야? "

"엄마가 최곤데 멀다고 못 오나?"

"언제 시장에 나가서 빨간 웃도리 하나 사다놔야겠다.

"빨간 웃도리는 왜?"

"저이 오면 주게"


엄마는 오늘도 골프 방송을 보려고 TV 앞으로 간다. 경기보다  엄마를 더 끌어당기는 빨간 웃도리 입은 남자를 보려고. 그 남자는 항상 엄마에게 '최고'라고 한다. 엄마가 그렇게 믿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엄마가 최고야!' 

아! 진작에 왜 말하지 못했을까? 엄마가 잘 들을 수 있었을 때. 세상 모든 근심, 걱정 던져버린 깨끗한 얼굴로 이쁘게 웃는 엄마를 바라보며 진작에 하지 못한 한 마디를 후회하며 눈물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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