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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Oct 22. 2023

행복을 주는 손

굵은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는 손이어도 나는 엄마의 손을 '섬섬옥수'라고 말하고 싶었다.

섬섬옥수를 초록창에 검색해 보니 '가늘고 고운 여자의 손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왔다.

고운 손이란 말이 들어가면 왠지 '젊다'는 느낌이 들어서 엄마의 손을 '섬섬옥수'라고 표현하려다 주춤했다.

수분이 빠진 엄마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보이지만, 막상 잡아보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50년 가까이 남의 집 일을 하며 손에서 물기 마를 새 없이 일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다.  

봄날 돋아난 여리디 여린 새순같이 촉촉한 엄마의 손을 잡으면 풀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손등에 녹색으로 이리저리 난초 잎처럼 뻗은 혈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섬섬옥수'를 포기하고 더 좋은 말은 없을까 궁리를 해 본다.


그사이 엄마는 잠깐 들었던 잠에서 깨어 인형을 아기처럼 안고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 노트북을 펼치고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엄마 손은 사랑의 손'이라고 썼다가 또 지우길 반복하던 나는 아예 손을 놓고 엄마가 거실 바닥 방석 위에 '효돌이'를 조심스럽게 눕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참! 이번 주엔 무슨 일이 있어도 복지사에게 효돌이를 돌려줘야겠다.'라고 잊고 있었던 약속이라도 생각 난 듯 다짐을 했다.

복지사를 만날 시간을 낼 수 없는 것도 아니면서 효돌이 거취(?) 문제를 차일피일 미루는 데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 


엄마가 효돌이를 애지중지 소중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어렸을 적에(태어나 기억이 없는 시기) 엄마가 저렇게 안고 다녔겠구나!'

'엄마가 저처럼 따스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흐뭇하게 웃었겠구나!'

'저렇게 사랑스런 손길로 소중한 보물 다루듯 나의 온몸을 어루만졌겠구나!'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하나, 둘,  꽃처럼 피어나면 머리에서 발 끝까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알 수 없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기억이 없었던 과거의 어느 순간들이 꿈처럼 다가와 따뜻한 욕조에 들어앉아 행복감을 느끼는 갓난아이가 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말로 표현하면 금방 터질 것 같은 충만한 기쁨의 순간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은 까닭이다. 아무도 모르게 나만 느낄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일찍이 유치환 시인이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 행복감을 느꼈다. 그것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에게 저토록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니 더없이 행복한 사람이다. 


엄마는 추워지기 전에 아이를 좋은 집에 보내야 한다며 안절부절 애를 태우는데, 나는 인간의 이기심을 제대로 발동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행복한 비밀을 단념하려니 묘한 아쉬움이 복지사 만나러 가는 것을 자꾸 막아선다.

조금 열어 둔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제법 차갑다. 엄마는 어느새 또 큰아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침대 시트를 벗겨서 네모나게 접어 효돌이에게 덮어준다.

"바닥이 왜 이렇게 차냐? 아이 감기 들겠다. 창문 닫고 불 좀 올려라."

다른 때 같으면 아직 보일러 안 돌려도 괜찮다고 미적거리겠지만, 아이 걱정은 곧 나를 걱정하는 것이란 생각에 식탁에서 손바닥 위에 턱을 올리고 엄마를 바라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넵!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백 번을 반복해도 엄마 손에 대해서 더 좋은, 아니 더 근사한 표현방법을 찾지 못할 것 같다.  

글쓰기를 잠시 미루고 이렇게 썰물처럼 온몸에 전해지는 행복감에 푹 담겨 효돌이 곁에서 엄마 눈길을 받으며, 엄마 손을 잡고 나도 한 잠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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