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선언 "그냥요"
“큰 사건은 한 번의 충동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작은 일로도 일어난다.”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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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갑자기 왜 나가는 건데?
- 그냥요.
나는 어색한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뭉뚱그렸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이유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얇은 선이 모여 퇴사라는 소실점으로 이어졌으니까.
선 하나에 하루 12시간 근무, 선 하나에 만성 위염, 선 하나에 작고 귀여운 월급, 선 하나에 회사 정치, 선 하나에 상사의 폭언, 선 하나에 알고도 당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선 하나에 공허함, 선 하나에…
나는 밤하늘의 별을 세듯, 실낱같은 이유를 떠올렸다.
퇴사의 이유에는 공황장애 증상같이 굵직한 이유도 있었고, 점심마다 순대국밥을 먹고 환기도 안 하면서 사무실에서 냄새를 풍기는 선배라는 얇은 이유도 있었다. (사실 얇은 선은 아니었다. 차마 치사하게 먹는 걸로 뭐라고 할 수 없어서 말은 못 했지만, 환기도 안 통하는 겨울 사무실에서 이도 닦지 않고, 순대국밥이 뜨끈한 히터 열에 익어가는 냄새의 타격감은 상당했다.)
어쨌거나 소실점의 종착지에서 나는 직장 열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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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생각하면 직선으로 쭉쭉 뻗어가던 선들이 남들의 ‘왜?’라는 질문 앞에서는 마구 뒤엉켰다. 그도 그럴 게,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가 만난 옆 팀 선배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전화로만 소통하던 재무팀 동료를 덥석 붙잡고 갑자기 구구절절 말하기에는 서로 난감하지 않을까. 뭐, 상대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기에는 너무 바쁘고 불편하니까. 그는 남을 사람이고, 나는 떠날 사람이다.
팀장님도 마찬가지였다. ‘업무 정리를 위해 한 달 더 근무해 줄 수 없냐’는 부탁을 거절하자, 그는 바로 다른 팀에서 어떻게 인력을 빼어올지, 인사이동 정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워낙 바쁜 팀이었기에 이해는 갔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봐 온 사람 중 일을 가장 잘하는 팀장이었다.
그런 상황이 더 편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그냥요.”라는 말은 얼마나 가볍고 적절한 표현인지.
‘거시기’와 같이 모든 걸 포함할 수 있으면서도, 사회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도도 높다. (왜 퇴사하냐는 질문에 “아, 좀, 회사가 거시기하잖아요.”라는 답은 아무래도 조금 거시기하다.)
마지막 예의를 지킬 수 있는 정중한 언어로, 나는 “그냥요”에 어색함과 약간의 자랑스러움을 섞어 웃었다. 상대도 약간의 부러움과 어색함을 섞어 웃어주었다. 그 순간마다 나는 마치 미리 쓰인 극본을 연극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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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은 원근법을 표현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탁월한 방법이다.
죽 그어진 하나의 선은 별것 아니다. 2차원의 납작한 세상일 뿐이라, 선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너무 작고 하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정도면 좀만 더 참아봐. 힘든 것 같지? 퇴사하면 더 지옥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러나 선이 하나, 둘, 셋, 그렇게 모이고 수렴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도 표현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이 된다.
점이 되어 더 이상 선을 이어 나갈 수 없는 순간, 자연스럽게 툭- 알게 되었다. 아, 여기가 끝이구나. 나 끝까지 왔네.
나는 소실점의 끝에 서서, 앞서 그려진 무수한 선들을 바라보았다. 원근감 속에서 공간이 깊이감을 얻듯,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퇴사와 이직을 반복하던 시간은 3점 투시도를 그리며 아슬아슬한 공간감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 내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던 걸까. 올라가고 싶던 거야, 내려가고 싶던 거야, 대체 어딜 향하고 싶던 거야.
선명한 이유 없이 퇴사를 선언하긴 했는데, 고개를 드니 아무 선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가 보였다. 당장 어디를 향하는 어떤 선을 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점에 앉아 어딘지도 모를 백지 너머를 바라보는 일은 아득하기만 했다.
너머가 있는지조차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뭐, 지금까지의 굵고 얕은 선들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어진 건 없는데 괜찮지 않을까. 이미 망했는데 괜찮지 않을까. 불안함을 정신승리로 살포시 덮었다. 넘을 것도 없는데 벌써 너머를 걱정하지 말자고.
퇴사 3일 전, 종종 인사를 하던 동기와 마주쳤다.
- 주임님! 들었어요. 갑자기 왜 나가시는 거예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 뭐… 그냥요.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부럽다는 웃음을, 나는 민망한 듯 자랑스러운 웃음을 연기한다. 이제 이 연극을 할 무대에 서는 것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 정도 유종의 미는 마지막 사회성을 끌어모아 해낼 수 있다.
어쨌든 그만두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실점을 향해 어찌어찌 다른 선들이 그어질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