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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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사랑하긴 하니?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올 때면 이해가 안 됐다. 누가 봐도 명백한데 왜 의심을 하는 걸까.
의심하는 사람은 더는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아직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고, 누가 봐도 사랑하는 상대에게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본인도 알고 있으니까 저렇게 애쓰는 거면서. 그럼 그냥 확실히 인정하는 게 편하지 않나.
나는 공감할 수 없는 화면의 채널을 돌리곤 했다. 엄마가 리모컨을 쥐고 있을 땐 “엄만 저런 게 재밌어?”라고 묻다 눈초리를 받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세상 냉철한 척하던 주제에, 눈물 콧물 쏙 빼며 질척이는 인간이 될 줄은. 그것도 그렇게 비웃던 ‘의심’에까지라도 다가가는 데 한참이 걸렸으니, “나를 사랑하긴 하니?”라고 묻던 그들은 나에 비하면 훨씬 현명한 눈치 백 단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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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학창 시절의 나는 소위 말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그런 스스로가 싫지 않았다. 적당히 얌전한 척하고 크게 사고를 안 치며 받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칭찬을 즐겼다. 재미없고 조용한 아이. 1년 동안 딱 다섯 손가락 정도의 친구들과만 교류하는 구석진 아이의 정석이었다.
취미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방구석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즐겼다. 다꾸 (다이어리 꾸미기)에 빠져 몇 시간이고 앉아서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스티커를 오리곤 했다.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은 ‘나는 꼼꼼한 인간일 것이다. 변화 없는 매일의 성실성이 요구되는 업무가 적성일 것이다.’라는 착각의 원인이 되었다. 일반적인 상관관계를 정확한 인과관계로 오해하는 오류를 범했다고나 할까. 이런 식이다.
- 나는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얌전했을 뿐 수업 시간에 늘 구석에 낙서하며 ‘딴짓’했지. 아, 야간자율학습도 툭하면 도망갔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취소해야겠다.
- 나는 변화를 싫어한다. 꾸준한 단순 반복 업무가 천직이다.
그러나) 조용한 걸 좋아하는 것과 꼼꼼한 단순 반복 업무가 잘 맞는 건 상관이 없다. 내 취미는 조용한 다채로움이었다. 취미를 꾸준히 하는 것과 일을 꾸준히 하는 것 역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 나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걸 선호한다.
그러나) 내 신체는 9시 출근, 6시 퇴근할 때보다 비규칙적인 3교대를 할 때 훨씬 활력이 넘쳤다. 무엇보다, 공공기관의 근무 시간은 나인투식스 (9-6시)가 아닌 세븐일레븐 (7-11)이었다. 이건 나에 대한 오해이자, 직장에 대한 오해이니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물론 사전에 직업 조사를 철저히 했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조용한 걸 좋아한다고 꼼꼼하진 않다.
- 나는 기획하는 업무가 잘 맞는 사람이다.
그러나) 공공기관에서 사업 기획은 책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몰랐다. 수많은 사람과 만나 조율하고 합의하고 얻을 건 얻어내야 하는 것임을. 상사와 모기관 담당자와 식사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용역업체에게 만만히 보이지 않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누구보다 외향적인 인간이어야 함을.
이렇게 오해하여 선택한 직업이니, 제대로 맞았을 리가 없다.
아주 작은 일 하나를 하려고 해도 결재-결재-결재를 받는 문서 작업을 최소 3번은 반복해야 했다. 필요하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목구멍이 막혔다. 단순 반복 업무에는 권태감뿐 아니라, 불안함마저 느꼈다.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하니, ‘나’의 의미도 잃어버렸다.
계속되는 다른 기관과의 회의, 용역사와의 협상, 조직 내 인간관계, 모체 기관과 상사에게 해야 하는 의전에 기가 쭉쭉 빨렸다. 기획서를 작성한다는 건 창의적 생각을 쓰는 게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취합하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휴먼명조체로 써야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요. 강조 글씨 색은 왜 꼭 이런 시퍼런 파란색을 써야 하는데요. 그냥 팀원들끼리 공유하는 문서면 형식 좀 자유롭게 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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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공공기관의 사무행정직으로는 최악의 상성인 인간이었음에도 의심하지 못했다. 어쩌면 의심하면 안 된다고 무의식 중에 여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의심하면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시간이 무의미한 게 돼 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 기관이 잘못된 거야! 다른 공공기관은 이보단 낫겠지!’
그렇게 퇴사. 입사. 퇴사. 입사.
……이상했다. 언젠가부터 직장 사람들이 나만 보면 ‘어디 아프냐.’고 묻기 시작했다. 아뇨, 오늘 컨디션 좋은데요. (근데 왜 정작 아픈 날은 못 알아보는 거죠) 왜 이렇게 우울한 표정이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 전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표정이었는데요. (그보다 부장님, 걱정하기 전에 결제나 해주시죠.)
하긴, 그들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이란 게 뇌를 거치기 전에 눈물부터 죽- 흘렀으니. 버티기만 하면 정년이 보장될 직장인데, 하루하루 이유 모를 불안감에 미칠 것 같았다. 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걸려 오는 업무 전화에 심장이 쿵쿵 뛰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내 인생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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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탁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그제야 불안함에 가렸던 어떤 것의 제대로 된 형상이 보였다. 의심. 의문.
‘어쩌면 나는 공공기관 사무직에 안 맞는 사람인 건 아닐까?’
나는 진작 의문을 가졌어야 했다. 저자는 사랑을 말했지만, 삶을 지탱하는 기둥에는 사랑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너무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쉬이 의심을 시작할 엄두도 내기 어려운 것들. 날 지탱하는 것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용기를 내어 의심해야 할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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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답이 정해져 있는데도 의심하는 이들을 보며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많은 일들이 그렇지 않나. 연애 상담의 답은 이미 본인이 가지고 있다. 아무리 옆에서 “제발 그만 헤어져!”라고 외쳐도 소용없다. “그냥 퇴사해! 너 거기 아니야!” 친구들이 외쳐도 입을 꾹 다문 채, 비죽였던 나도 다를 바 없었다. 직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외쳤던 거겠지. “나를 사랑하긴 하니?”
입사할 때는 천직인 줄 알았다. 너무 당연하게 나의 20대를 쏟아부었던 길이라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의심하게 되는 순간, 물음표를 떠올리는 순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그게 나를 지탱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기둥 없는 지붕은 세워질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와르르 무너진 폐허의 돌덩이에 누워있는 백수가 되어서야, 원인 모를, 나를 미치게 만들던 그 지긋지긋하던 불안함이 사라졌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