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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찌 Oct 09. 2024

1-5. 퇴사하고 책(씩)이나 읽고 살겠습니다.

퇴사하고 뭐 할 건데?



그만두는 이유를 증명할 필요도, 그만둔 이후에 잘 산다는 걸 증명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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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사 선언 후,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질문은 늘 똑같았다.

 - 그래, 나가면 뭐 하려고?


 나가는 마당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겠다고 아등거릴 필요는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내 성과를 판단할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껏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인간으로 보여도 상관없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러나 적당히 무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냥 책이나 읽고 지내려고요.

     

 내 미소가 너무 인공적이었던 걸까. 늘 반쯤 좀비 표정인 사람이 갑자기 웃으니 수상해 보였던 걸까.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한 직장 선배는 “이미 합격한 거 아니야? 요즘 새로 채용 공고 난 곳 어딘지 찾아보자.”라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물론, 그는 진짜로 검색했다.)


     

 가족과 친구도 마찬가지였던 걸 보면, 단순히 내 표정 연기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했다.

 계산하지 않은 행복에 만연하며 “그냥 책이나 읽으며 집에서 지낼 거야.”라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마주한 그들의 눈빛에서 분명 뭔가 계획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보였다. 적어도 지금은 힘들어 잠시 쉬는 것일지언정 금방 다시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억울했다. 저는 정말로 계획이 없다니까요! 제발 의심 좀 해주세요. 아니, 의심을 못하겠다면 저의 무능력함과 무계획성을 믿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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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억울한 오해는 백수가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무럭무럭 몸집을 불렸다.

     

 - 정말이야. 그냥 진짜 책 읽고 필사하고… 그러면 하루 금방 가.

 - 필사? 그것 봐! 너 글 쓰는구나! 작가 되려고 하는 거지?

 - ......?

    

 - 1년 전에 산 아이패드 이제야 쓰고 있어. 책 읽고 낙서하는데 재밌더라고.

 - 그림? 그걸로 뭐 하려고? 이모티콘?

 - ......? 

    

 아주 조그마한 것에서도 그들은 내 미래의 업을 찾았다.

 글을 쓰는 작가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물론 되고 싶다. 그러나 꿈과 취미를 타인이 마구 엮어 어림짐작하는 것은 지독히 폭력적으로 느껴져,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몸을 움츠리고 도망치곤 했다. 책을 읽는 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일 뿐 미래 경제활동의 기반을 위한 ‘노오력’의 영역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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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인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최소한 병원에 다닐 정도로 아프거나(남들이 다 아픈 정도로는 안 된다.), 번뜩이는 아이템이 있거나, 숨겨왔던 어린 시절의 부푼 꿈 정도는 있어야 인정받는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직장을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그만두는 것 역시 인정을 받아야만 허락을 받을 수 있는 듯하다. 퇴사 기안을 올리면 결재를 받는 것처럼.     


 퇴사 후 계획 없이 집과 카페를 오가며 책이나 읽고 지낸다는, 아무 생각 없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건 선택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더욱이, 흙수저에 가까운 갓 서른 초반의 사회 초년생이 그런 사치를 평온히 누릴 거라고 믿을 수 없던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명확한 질병도, 계획도, 꿈도 없는 내게서 그들은 내 미래를 찾는 것만큼이나 불안을 들추려 했다.     


 남들은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데, 책이나 읽으며 아무 계획 없이 지내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라고. 이 대한민국에서 청년 백수가, 책이나 읽으며 지낸다고? 백수에게 책 읽기는 ‘책이나’가 아니라 ‘책씩이나’ 읽는 것이었다.          





#

 책(씩)이나 읽고 지낸 백수가 된 지 몇 개월이 지났다. 종종 도서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이나 강연을 들으러 다녔고, 남는 시간에는 혼자 책이나 읽으며 현재에 머물렀다. 충만했다가 즐거웠다가, 감탄했다가 키득거렸다가, 때로는 지루했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500페이지 이상의 벽돌책들은 백수에게도 어려운 일이구나, 생각하면서.

 가장 늘어지게 보내는데, 가장 지금 시간의 밀도감이 높은 기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감각이었고, 지금을 온전하게 사용하는 이 감각은 몇 달이 지나도 문득문득 벅차곤 했다. 이렇게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현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의미한 탕진일까.     


 글쎄, 몇 개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본다. 고민하고 울고불고 짜다가 직장을 그만두고서야 깨달은 건, ‘그만둔다’는 게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세상이 무너질 리도 없다. 그토록 목매던 타인의 시선이 시릴 정도로 시원하게 끊어졌다.     

 마찬가지 아닐까. 퇴사가 별일 아니듯, 퇴사 후 지내는 삶도 별것 아니라고. 세계 여행 따위 하지 않아도. 갑자기 유튜브나 SNS 계정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만두는 이유를 증명할 필요도, 그만둔 이후에 잘 산다는 걸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퇴사하고 뭐 할 거냐는 질문에, 그리고 백수가 되어 뭐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앞으로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냥, 책‘이나’ 읽고 지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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