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사자의 정체성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
Q. 귀하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ㅁ 학생 (초/중/고)
ㅁ 대학생, 대학원생
ㅁ 취업 준비생
ㅁ 재직자(회사원)
ㅁ 자영업자
ㅁ 은퇴/전업주부/무직
ㅁ 기타( )
인터넷 개인정보 칸을 클릭하던 마우스 커서가 화면 한가운데에 멈췄다. 나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마우스 커서의 날카로운 끝으로 응답지를 하나하나 쓸었다.
ㅁ 학생. 대학교를 졸업한 지 곧 10년인데, 아직 인생을 배우는 중이라고 하면 학생으로 인정해주나요.
ㅁ 취업 준비생.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난 취업할 생각이 한 톨도 없다.
ㅁ 재직자. 세상 사람들 저 24일 18시간 전에 퇴사했답니다. 모두 알아주시면 좋겠네요.
ㅁ 자영업자. 세상 자영업자 사장님들 모두 존경합니다.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저는 못 하거든요.
ㅁ 은퇴/전업주부/무직. 이렇게 세 가지를 한 분류로 묶다니 성의 없기도 해라. 전업주부와 무직이 왜 같은 카테고리죠?
나는 퇴사와 은퇴 사이의 관계를 고민했다. 그 사이에는 자의성과 타의성, 타인의 눈초리와 박수갈채라는 엄청난 골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무직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반항심이 올라왔다. ‘무직’은 직장이 없는 상태다. 직장이 있음이 기본값이고, 없는 것에 ‘없을 무 無’를 붙여 구분해 걸러낸다.
무슨 일을 하냐는 물음의 기준이 왜 꼭 ‘경제 활동’의 유무가 되는 걸까.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인 걸까.
#
요즘 내 소개를 하거나, 근황을 전할 때면 ‘얼마 전에 퇴사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들은 끄덕였고, 그 이상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편한 설명이었기에 퇴사 이후의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정확히 체크해야 할 당장의 화면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런데 선택지는 죄다 경제활동과 취업을 기준으로 한다. ‘미취업자/취업준비생-재직자-은퇴자.’ 취업이라는 기준점이 인생의 시기를 나누어 버린다. 마치 그 전후로 그 사람의 세상이 바뀌어 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기원전/기원후'로 나누는 것도 아니고.
#
애초에 선택지도 이렇게 대충 만들었는데, ‘나는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나 역시 대충 정의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냥 ‘백수’라고 말이다.
“백수”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두 음의 음성은 ‘무직’이라는 묵직함이 주는 정체성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뉘앙스를 주었다. 백수. 다시 한번 말했다. 끝이 닫히지 않고 새어나가는 발음이라서일까. 가벼움을 넘어, 게으름을 넘어, 태만한 한량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바라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 생각해 보았다. 별 것 없었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백수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나의 정체성은 잘 놀고, 잘 먹는, 혼자서도 잘 사는 건강한 존재인 백수다. 그냥 한량이 아니라 건강한 자립형 한량이라고나 할까.
그래, 이런 가뿐한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이 말 저 말 첨언하는 건 백수가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이 설문지를 받아 읽을 독자의 몫이다.
나는 ‘기타’ 항목을 클릭하고 괄호 안에 ‘백수’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