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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찌 Oct 14. 2024

2-5. '푹' 잠들기

- 만만하지 않은 숙면


우리는 수면에 대해 좀 더 경건해져야 한다. 수면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잠들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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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의 가장 큰 자산은 시간이다. 이 넉넉해진 시간으로 한순간에 제대로 된 인간으로 갱생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역시나 그럴 리가 없다.


  곰이 인간이 되려고 하루하루 마늘을 먹듯이, 오늘은 어제보다 약간 더 움직이고, 다음날은 조금 많이 햇볕을 쬐고, 적어도 한 끼는 제대로 먹으려고 노력하면서 아주 조금씩 나아진다. 신화 속 곰은 인내의 달콤한 결과물로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인간이 되었으나, 현실에서 인간이 건강한 인간으로 복귀하는 과정은 하루에 털 한 올 한 올이 벗겨지는 지난한 과정이다.     


  특히 조금만 방심하면 툭하면 무너지는 게 바로 ‘수면’이었다. 퇴사 전의 수면은 언급할 가치가 없게 엉망진창이었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퇴사 후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놈의 생각과 핸드폰이 문제였다.

  저녁을 먹고 잠시 졸다가 9시쯤 되면 기가 막히게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뭐랄까, 세상 창의적인 생각이 마구 떠오를 것 같고, 모든 작업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광기의 맑음이랄까. (물론 현실은 대부분 핸드폰을 보다 새벽에 잠들었다.)


  직장인일 때는 오늘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풀기 위해 충혈된 눈으로 늦은 새벽까지 핸드폰을 붙들었다면, 백수가 된 이후에는 어차피 다음날 낮에도 잘 수 있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새벽을 붙들었다. 수면이란 놈을 아주 만만히 보고 만 것이다. 백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일 테니까. 까짓 거 나중에 자면 되지, 라면서. 

  하지만 언제나 패배는 오만과 방심에서 비롯된다. 스마트 폰도 없던 시절에, ‘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던 니체가 했던 경고를 신중히 받아들여야 했다.     



  몇 개월은 괜찮았다. 아마 수면 외의 다른 갱생된 면들 (스트레스를 덜 받고, 끼니를 챙겨 먹고, 햇볕을 쬐는 것)이 당장은 좀 나아지게 만든 것일 테다. 하지만 그 갱생된 면이 일상이 되자, 뭔가 몸이 다시 삐걱대기 시작했다. 마치 근육의 조직 한 가닥 한 가닥이 물에 젖은 듯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낮에 한숨 자고 일어나도 머릿속이 지저분했고, 먹는 양은 비슷한 것 같은데 체중은 불었다.


  맑은데 멍했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에 고카페인 음료를 들이마셨을 때처럼, 깨어는 있는데 구름 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은데, 동시에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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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면의 끈질긴 점은 수면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눈을 뜬 삶에도 끈적하게 달라붙어 저를 제대로 다루라고 명령한다. 그 명령을 거부하면 즉시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주 악덕 상사가 따로 없다. 원리 원칙에 철저해서 융통성이라고는 0에 수렴하는 상사.

  여기에서는 퇴사할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수면을 경건하게 다루고, 그 앞에서 겸손해지면 그 누구보다 온화한 상사가 된다는 점이랄까. 어쨌든 그 원칙만 지키면 오히려 나의 삶을 훨씬 풍성하게 만드는 성과급을 내려준다.     



  제대로 잠들기 위해서는, 낮 동안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백수가 되면서 타인의 기준을 따르며 하루를 보낼 필요가 없지만, 내 신체의 기준은 스스로 지켜줘야 하는 것이었다.


  낮에 자는 시간은 30분 이내로 하기. 낮잠은 하루에 한 번만 자기. 야식 먹지 않기. 밤에 배고플라치면 바로 침대에 눕기. 마치 수영장에서 숨쉬기만큼이나 수면 역시 눈을 감고 신체 리듬을 세심히 다뤄야 했다.

  그렇게 며칠 만이라도 하다 보면 확연히 몸이 가뿐해진 게 느껴졌다. 아침에 이렇게 맑은 정신 상태로 있을 수 있다니, 놀랍기까지 하다. 역시 수면이란 놈은 악덕이면서 후한, 우유 빠진 부드러운 라떼 같은 상사다. 니체의 조언대로 수면에 대해 조금만 더 경건해지면 다루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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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안타깝게도, 니체는 스마트 폰이란 놈을 너무 얕봤다. 인간의 잠을 이 작은 한 손바닥만 한 물건이 도둑질할 줄은 몰랐겠지. 그 중독성에 대해서도.      

  몸이 조금 괜찮아질라치면, 다시 수면의 경건함은 전자파 화면에 자주 밀렸다. 그 바람에 다시 몸이 묵직해졌다가 반성하기를 반복 중이다.

     

  역시 백수가 꼭 갱생으로의 직행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제는 웹툰을 보다가 새벽에 잠들었다. 반성의 의미로, 오늘은 다시 경건하게 빈다. 이제는 정말로 안 그럴게요.

  나는 오늘도 마늘을 먹으며 한 올 한 올 털을 떨구는 곰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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