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러리와 주인공
고고 자료 가운데 사람 뼈는 주인공이라기보다 늘 들러리였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그 사람이 남긴 유물이 더 주목받는다는 사실이.
<뼈 때리는 한국사>. 우은진
#
영수증 명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소비를 하는가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아마 내 영수증을 분석하면 나라는 인간은 이렇게 파악될 것이다.
“닭가슴살을 주기적으로 구매하는 걸 보아,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자주 실패하고 또 도전하는군. 끈기가 없는 인간이겠어. 의류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종이와 문구류에 관심이 많은 인간임이 분명해. 자가 아닌 전세로 사는 걸 보아 아마도 경제적으로 상류층은 아니고, 평수를 보니 3~4인 정도의 가족 구성원을 이루고 사는, 탐폰을 구매하는 걸 보면 여성일 확률이 높겠어.”
이뿐이겠는가. 아마 파고들다 보면 나의 신체 사이즈, 기상과 취침 시간, 그 외에 나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 대한 거의 모든 걸 파해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나의 다인가?
그래서만은 안 되지 않나.
위에 나열된 실재적 특징은 분명 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단지 그런 사람인 것만은 아니’지 않나?
#
물건이 아닌 한 사람을 볼 때, ‘사람’에서만 볼 수 있는 흔적이 있다.
근육을 타고 새겨지는 눈가의 주름, 자주 취하는 자세로 인해 눌린 특정 부위의 뼈, 달리는 사람의 탄탄한 근육, 처진 살들을 따라 불룩불룩 굴곡진 곡선.
꼭 뼈와 살에만 새겨진 흔적뿐이 아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 주변의 복장을 터뜨리는 우물쭈물함과 사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던 다정함이었다는 것, 우유나 요거트를 먹으면 꼭 물로 씻어 말린 후 버리는 단정함, 힘들다고 하니 2주간 매일 전화를 걸어오던, 더욱 쾌활하게 노력하던 마음이 느껴지던 목소리.
영수증으로는 알 수 없는 이들을 떠올린다.
#
학창 시절, 그다지 수업에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기에 역사 교과서에 나온 각종 사진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매 페이지 있던 각종 사진 중 ‘물건’이 대다수였다는 건 기억 난다. 물론 당시 사람의 사진을 찍을 수야 없었겠지만, 하물며 사람의 유골이나 당시 사람의 신체 정보와 관련된 것보다 물건 자체의 비중이 높았달까.
수학의 ‘집합’ 마냥 유일하게 달달 외우던 국사 첫 장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뗀석기와 고인돌이 시작이다. 계급이 나뉘기 시작했다는 청동기를 지나서 미륵사지석탑, 금동대향로, 첨성대, 측우기, 동굴벽화, 시대별 의상 등등. 그 유물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기술 발전 정도, 신분제, 사회 경제적 의미 등을 파악한다. 유물 옆 누워있는 인간의 뼈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있지 않은 이상 들러리가 되고 만다.
물건으로 파악한 뼈의 주인. 우리는 그 사람을 정말 아는 걸까.
그럴 리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직 물건만이 나를 설명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삶의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가 되고 만다. 내 공간에 물건을 쌓느라 내 몸 둘 곳은 점점 찌그러진다. 웃는 주름과 단단한 근육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스마트 폰 스크롤을 내리며 인터넷 쇼핑을 하며 죄다 써버린다.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며, 어차피 맛도 못 느끼고 원샷 할 각종 커피 원두에 사치를 부린다.
하나도 남김없이 퇴사 전 내 이야기다.
그렇게 유물론적 인간으로 살았으면서도, 막상 유물로 남길만한 물건도 없다. 워낙 지류를 좋아하다 보니, 부모님의 “죽으면 그 종이를 다 가지고 갈 거냐.”는 말에 “무슨 소리야. 이 종이로 나만의 왕릉 정도는 만들어 줘야지.”라고 했다가 등짝을 맞을 정도의 종이가 쌓여있긴 한데, 역시 유물로 인정받긴 어려울 것 같다. 재벌가의 누군가처럼 박물관을 만들 만큼의 예술품을 모으는 것도 요원해 보인다.
그러니 더더욱 물건의 들러리로 사는 건 무척이나 억울한 일일 테다. 나도 당신도, 단지 그런 사람인 것만은 아닐 테니까.
* <하얀 이빨>. 제이디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