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자동차 핸들’에 배치하면 ‘운전자’가 된다.
‘손’과 ‘연필’이 배치된 결과 ‘편지’가 나올 수 있고,
‘손’을 ‘피 묻은 칼’에 배치할 때 ‘용의자’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일상의 빈칸 / 최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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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틱거리는 초침 소리조차 무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색무취의 생각 한 올마저 짐처럼 느껴진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하는 생각이 올라오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묵직한 하루에,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까지 더해진다. 실체 없는 허상에 횡격막까지 짓눌리는 기분이다. 차라리 딸꾹질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지도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은 결국 아예 생각하기 자체를 회피하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과정이었다. 지금 봐도 아주 기름기 가득하니 무겁다. 도저히 사람이 먹을 게 못 되는 기름 덩어리 국물을 머금은 느낌이랄까.
왜 몸이 그 지경이 되도록 미련하게 벗어나지 못했을까. 혹시 주변에 나와 같은 미련 곰탱이가 있대도 너무 구박하지 말아달라 말하고 싶다. 변명을 하자면, 생각할 힘조차 없었으니까.
제대로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질문이 필요할 때야말로 사실, 질문을 떠올리기조차 버거운 시기인 법이니까.
그러니 이럴 때는, 자신에게 다그치듯 질문하기보다, 담소를 나누듯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점심 뭐 먹을래?’처럼. 그냥 툭. 내게는 최장순 저자의 <일상의 빈칸>에서 ‘배치’에 대한 장이 그렇게 다가왔다.
저자는 내 손에 무엇을 배치하는가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운전대를 배치하면 운전자가 될 수도 있고, 연필을 배치하면 작가가, 주방용 칼을 배치하면 요리사가, 사건 현장에서 피 묻은 칼을 배치하면 용의자가 될 수도 있다고.
이 이론(?)에 따르면 오늘의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가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없다. 그냥 툭. 간단하게 물어보면 된다.
- 오늘 하루, 내 손에는 무엇이 가장 많이 들려 있었더라?
전에는 하루 대부분을 회사 키보드와 전화기를 손에 배치하고 있었지.
요즘 아이패드 드로잉을 배우겠다며 많은 시간 아이패드가 들고 있다. 그러면 마치 어릴 적 매일 크레파스를 쓰다가 처음으로 수채화 물감을 쓰던 때처럼 설레는 학생이 된다.
지금 손끝에는 노트북 키보드가 있다. 미숙하지만 내 이야기 글을 쓰는 작가다. 단어와 문장 선택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즐겁다.
손에 쥐는 것을 추상적인 개념(명예, 부, 사랑 등)으로 떠올리면 막막하다. 반면 ‘실질적 물성을 지닌 것’(이불, 펜, 치즈, 살결)으로 떠올려 보는 건 무겁지 않다.
내 살결과 누군가의 살결을 배치하면 사랑에 빠진 존재가 생긴다.
그럼 이불, 손, 전기장판, 스마트폰을 배치하면? 정답, 어젯밤 잠들기 전 웹툰을 보던 백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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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생각이라는 게 진한 사골 육수처럼 깊은 맛만 낼 필요는 없다. 당장 제대로 살고 있는지 답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너무 멀고, 너무 무겁다. 나는 매일 돌을 산꼭대기로 올려 낼 수 있는 시시포스가 못 되는 인간이다. 대신 오늘 하루 내 손에 무엇을 잡고 싶은지 정도는 떠올릴 수 있다.
‘오전에는 책을 잡고, 점심에는 식빵과 치즈를 썰어 하얀 그릇에 담아내고 싶어. 오후에는… 밥 먹으며 생각해 보지 뭐.’
참 쉽다. 한심하게 살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가득했던 몸을 일으켰다.
‘행복을 손에 쥐고 싶다.’는 두렵다. 죄 다 나를 비웃으며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 흘러가 버릴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오늘 하루 잡고 싶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니, 언제든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오늘 손에 쥐고 싶은 건, 음, 책을 읽고 싶고, 치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