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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찌 Oct 13. 2024

2-4. '제때에' 밥 먹기

- 밥 먹어! - 잠깐만!




한순간 아이들을 현실로 데리고 오는 것은 엄마의 목소리.
특히나 “밥 먹어라”는 아이들 생활의 기준점이죠. 
/ <이수지의 그림책>. 이수지



#

  어릴 때면, 집에 꼭 하루 세 번 울리는 말이 있었다.

- 밥 먹어!

- 5분만!     


- 밥 먹어!

- 잠깐만!     


- 밥 먹어!

- 이것만!


  밥 안 먹어도 되니까 5분만 더 자고 싶은데. 조금만 더 하면 게임 보스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엄마가 밥 먹으라는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절묘했다. 내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정해진 시간의 가름이 귀찮았다.

  밥 같은 거 그냥 나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반찬도 맨 그게 그거면서. 툴툴거리곤 했다.     



  고등학생 때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밥 먹어!”의 외침 대신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 종소리에는 절대 “잠깐만!” 따위를 외치지 않았다. 종이 울리기 1분 전부터 친구들과 전투 자세에 들어갔다.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필기구는 진즉 필통에 넣었다. 덜렁거리던 실내화를 바로 신고, 한쪽 다리를 책상 밖으로 뺐다. 빨리 끝내 달라는 무언의 외침을 담아 선생님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종이 울림과 동시에, 학교에 물소 떼가 달려가는 듯한, 웅장한 진동이 일었다. 포식자였던 선생님은 그 시간만큼은 노쇠한 사자가 되어 물소 떼 사이에서 종잇장처럼 나부꼈다.


  밥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는 오전 수업이 끝났다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아무리 엄한 선생님이라도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는 수업도, 잔소리도, 숙제 검사도 이어가지 못했다. 마치 엄마에게 혼나는 와중에 찾아온 할머니와 같은 존재랄까? 그건 일종의 절대적인 기준점이었다.          





#

  “밥 먹자.”는 말은 직장에 들어가며 다시 한번 변하며, 그 권위를 잃었다.


  아침밥 대신 커피를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커피는 아침밥이자 수액이자 각성제이자 생명수다. 야근 후에 돌아온, 밤 11시. 냉장고 앞에 앉아 아무거나 꺼내 입에 쑤셔 넣고 잠드는 날이 많았다.

  더 이상 ‘밥 먹어!’라며 내 시간의 경계선을 강제로 지어주는 부름은 없었다. 회사에서 “밥 먹어!”는 “밥 먹을래요?”가 되었고, “잠깐만!” 대신 “먼저 드세요.”라는 선택지가 생겼다. 업무가 많은 시기에는 점심을 거른 채 오전에 하던 일을 이어 나가곤 했다. 정신을 차리면 서너 시라 밥을 먹기 애매해졌고, 그럴 때면 서랍에 넣어 둔 과자를 먹었다. 그러고 나면 또 저녁 시간이 애매해졌다.

  “그냥 저는 저녁 안 먹고, 차라리 빨리 야근 끝내고 집에 가서 먹을게요.” 이 말에 빨리 퇴근하고 싶다는 사람을 고작 ‘밥 먹자’는 말로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 이러다 나 죽으면 내 몸에서 과자만 나오는 거 아닐까?

  덤덤히 과자를 까먹으며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친구는 역시 덤덤히 답했다.

- 무슨 소리야. 이미 지금 혈관에 흐르는 건 커피야.          



  분명 어릴 적 원했던 대로, 나 먹고 싶을 때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과자로 때울 수도 있고, 커피로도 먹은 셈 칠 수도 있다. 아무도 내가 하던 일을 ‘밥 먹어야 한다’는 이유로 끊지 못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아무도’에 나 역시 포함된다는 거였다. 나조차도 ‘밥 먹어야 한다’고 하던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저녁 차려 먹어야 하니 야근은 못 합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대로 그릇에 담긴 밥상에 앉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 누가 나를 위해 따뜻한 나물에 밥 한 끼 차려줬으면 좋겠어.

  내 칭얼거림에 친구는 차분하게 나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 돈을 내고 백반집에 가면 돼...          





#

  백수가 되고 부모님이 계신 집에 기어들어 왔다.

  혼자 자취하던 곳에 있던, 내 골반까지 오던 소형 냉장고가 아니다. 냉동고가 달린, 그 세 배 높이의 양문형 냉장고가 있다! 냉장고를 연다. 세상에, 야채가 있다. 반찬통이 있고, 밥이 있다.     


  통, 통, 통. 양파를 썬다. 썩, 썩, 썩. 양배추도 썬다. 당근은 썰기 귀찮아서 보통 생략한다. 뒤에서는 전자레인지에서 밥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굴 소스나, 마파두부 소스를 넣으면 별다른 고기를 넣지 않아도 맛이 좋지만, 기분 좋은 날에는 냉동 새우나 다진 고기를 넣기도 한다. 한국적인 맛이 생각날 때는, 그 어떤 양념보다 강된장 듬뿍 한 스푼 넣으면 별미가 따로 없다. 음식 맛을 스무 배는 올려준다는 고소한 참기름을 두르고, 김가루까지 뿌리는 사치를 누린다. 따끈한 볶음밥 앞에, 냉장고에 있던 배추김치며 깻잎무침이며 멸치볶음이며를 꺼낸다.

  한 상이다. 밥그릇과 국그릇이 분리되어 있다. 어느 때는 슴슴하고, 어느 날은 달짝지근하고, 어느 끼니는 짭조름하다.          




  학창 시절,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성난 소떼처럼 달렸던 게 단순히 밥을 먹고 싶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밥시간의 종소리는 합법적으로,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공부를 그만두어야만 하는 울림. 생활의 기준점이었기 때문이다.


  백수가 되자, 다시 멈추었던 시간의 기준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전과 오후를 나누고, 오늘과 내일을 나누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마무리를 덮어주는 따끈한 밥.     

  물론, 매 끼니 어른은 되지는 못한다. 종종 아침에는 여전히 커피 한 잔으로 때우기도 한다. 그래도 하루 한 끼 정도는 ‘건강히 제때에 먹자’고 다짐한다.          




#

  백수가 되어 시간이 많아진 나는 가족들의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제대로 그릇에 담긴 한 상의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참고로 백수는 집안일을 해야 덜 구박받는다. 밥 하기, 빨래 널기, 방 닦기 같은. 백수 생활 필수 지침 세 번째 정도로 중요하다.)

  애호박과 버섯에, 두부도 듬뿍 넣는다. 강된장에 물을 많이 풀어 된장국을 끓이면 그냥 된장국보다 진한 국물을 맛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청양고추로 칼칼한 맛까지. 나는 뿌듯하게 한 수저 떠서 맛을 본다. 단전에서부터 크, 소리가 절로 난다.     


  퇴근한 가족들에게 어서 먹이고 싶다. 그들이 옷을 갈아입자마자 외친다.

- 밥 먹어!

  지금이 제일 따뜻해서 맛있는데. 지금 먹어야 하는데! 가족들은 애가 타는 내 속도 모르고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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