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끼 Mar 10. 2024

과분하게 아름다운 것

과분하기에 아름다운 것


곤궁한 시기에 케네디는 이 작품을 만들었다.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정의 그 자체로 보인다.

과분하게 아름다운 것.





#1.

 사람은 ‘먹고살 만해질 때’ 예술을 찾고, 사유를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가 융성한 시기에 탄생한 수많은 철학자와, 르네상스 시기에 찬란히 피어나던 온갖 분야의 예술작품만 봐도 그렇다. 당장 배를 곯고 있는데 철학과 예술을 찾는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로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문화 예술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과 예체능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건 꿈이라는 수단으로 ‘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다.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정신 차려.”

 이어서 앞으로 100세 시대의 노후 준비, 내 집 마련, 매월 월급이 나오는 안정적인 삶을 언급하며 끝없이 압박해 나간다. 꼬박꼬박 적금을 들고, 노후를 위해 연금을 들고, 이 땅에서 내 명의의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철학도, 사유도, 예술도 ‘과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퇴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앞으로 무얼 할지 물었다. 그들은 내가 기술을 배우거나, 다른 직종으로 이직하거나, 그조차 아니라면 해외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길 기대했다.     

 나는 그저 매일 책을 읽고 지낸다고 했다. 책을 읽으며 적고, 곱씹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며 지내고 싶다고. 앞으로도 당분간 이렇게 지낼 거라고 답했다. 그들이 기대한 밥벌이에 대한 답은 해줄 게 없었다.

 그 말에 몇몇은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철이 없네.’

     

 매월 꾸준한 월급을 받지 않은 채, 책을 읽고, 필사하고, 천천히 생각하는 삶은 퇴사자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3.

 밥벌이의 소중함을 모르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책임진다는,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주체성의 근간이다. 땀 흘린 노동에서 배우는 삶은, 책에서 배우는 삶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노동으로 모아 둔 경제력은 나를 지켜준다. 나 역시 퇴사하기 전에 철저히 계획하여 돈을 모으고, 1년 이상 먹고살 수 있는 계획을 짜두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백수 기간은 쌓아 올리는 게 아닌, 쌓아 둔 걸 빼내는 시기다.

 30대 초반. 가장 열심히 쌓아 올려야 할 시기에, 쌓기는커녕 야금야금 곳간을 비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어리석은데, 그 와중에 고작 책이나 읽으며 산다니.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다. 분명 백수 주제에 책을 읽고 사는 삶은 너무나 과하다.


 복리의 마법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이 시기에 ‘모으지’ 않는 시기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비난하는 과한 아름다운 삶을 생각해 보면 고작 이런 것들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삶이라니, 과하다.

 대낮에 햇볕을 쬐며 산책하는 삶이라니, 과하다.

 삼시세끼 제대로 그릇에 식사를 차려 먹는 삶이라니, 과하다.

 자기 계발서도, 투자서도 아닌 소설이나 철학서를 읽는 삶이라니, 과하다. 

         

 기묘하다. 기술을 배우고, 회사에 출근하고, 인내심을 발휘해 꾸준히 적금을 드는 건 과분하지 않은 삶인데, 고작 생각 좀 하고 책 읽으며 삼시세끼 제대로 챙겨 먹는 건 그토록 과분한 삶이라니.

 쌓아 올리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4.

 백수가 된 지 몇 달이 흘렀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식어가는 커피 향이 난다. 평일 대낮의 동네 카페는 조용하다. 어쩐지 자연스럽게 알았다. 이 시기가 점점 끝나가는구나. ‘밥벌이’의 시간이 오고 있다.


 그러나 이전처럼 심연같이 끝없는 불안감도, 노동에 대한 지긋지긋한 감정도 들지 않는다. 정확히는 과분한 삶이 끝난다는 느낌보다, 균형을 찾은 새로운 삶을 살 준비를 마친 기분이다. 어쩐지 이 과분하게 아름다운 것들 –책을 읽고, 철학자들의 생각에 감동하고, 미술관과 영화관을 다니고, 밥을 잘 먹는–을 이전처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선까지가 내가 원하는 곳인지, 내 삶에서 꼭 사수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과분하게 고민했으니까.

    

 마음이 곤궁했던 시기, 내게 과분한 것들을 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풍요로운 시기에 접했다면 (풍요로운 시기에 책을 읽고 사유할 시간이 더 없었다는 것은 또 다른 모순이지만) 그저 유희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곤궁했던 시기였기에 절박하게 아름다웠다. 삶에서 과분해서는 안 될 것들이 사실 그 무엇보다 과분해져 버린 삶을 살았던 거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살진 않겠다는 다짐도 곁들였다.

     

 분수에 맞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과분하기에 더 아름다웠음을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전 16화 단기-비숙련-계약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