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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Mar 15. 2024

시간을 손해 보는 마음



 OTT 구독을 해지했다.

 5개월간 구독했는데, 정작 본 콘텐츠는 2개뿐이다. 항상 ‘어떤 걸 볼까.’ 고민하며 손가락으로 휙휙- 끝없이 이어지는 화면 스크롤을 내렸다. 그렇게 ‘나중에 볼 목록’에만 한가득 넣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났다. 1시간 동안 볼 만한 걸 찾으려다, 찾는 데만 30분이 지나고고, 이미 지쳐버리는 바람에 정작 찜한 영상들을 보지 못했던 거다. 괜히 30분이라는 시간만 날린 것 같아 기분마저 안 좋아졌다.







     

 “요즘 네가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어?”

 한숨을 길게 내뱉는 내게 엄마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사실 이 답답함이 스트레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걸. 이유도 모른 채, 마음이 답답했다. 책이나 읽는 백수로 이렇게 잘 놀고, 잘 먹고사는데, 나는 왜 또 몇 개월 만에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다시 에휴우우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낮에 햇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평일 낮의 한적한 동네 카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감격스럽다. 백수지만 나름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매일 책을 읽고, 필사하고, 글도 가끔 쓴다. 도서관의 각종 문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배우고 싶은 게 있어서 인터넷 강의도 듣는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차려보면 금세 잠이 들 시간이다.


 아직 못한 게 많은데… 자꾸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일들이 눈에 밟힌다. 계획대로 해내지 못한 하루가 쌓여간다.


         





 왠지 불안해졌어앞으로도 시시한 일만 잔뜩 있으면 어떡하지나만 재미없고 힘든 건 싫은데…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 <메멘과 모리>. 요시타케 신스케


    

 내 마음을 깨닫는 실마리를 준 건 <메멘과 모리> 그림책이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 나는 시간을 손해 볼까 봐 불안했구나.’

     

 무의식 중에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게 아닐까. ‘더 즐겁게 보내야 하는데.’, ‘더 알차게 보내야 하는데.’, ‘사실 이 시간에 저걸 했어야 더 이득인 거 아닐까?’

 강의를 듣느라 글을 원하는 만큼 쓰지 못하고, 문화센터에 다니느라 그림책을 만들어보겠다는 다짐만 몇 개월 째인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걸 하느라, 못하고 흘러가 버린 다른 일들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면 이 시간에 저걸 해야 할지도 몰라.

     

 그런데, 반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 온종일을 보냈다면, 나는 불안하지 않았을까. 청개구리 같은 내 천성을 떠올리면 그건 절대 아닐 거다. 분명히, 하지 못한 것(배우고 싶은 걸 배울 기회, 여러 프로그램에 다닐 기회)이 흘러가는 게 불안해 애탔을 거다.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고선택할 수 없는 일이 있다.’라는 거지그걸 구별할 줄 알게 되면 좋겠네. <메멘과 모리>


   

 나는 가장 재미있고 알차게 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혹시 이걸 하느라 저걸 못하는 게 손해일까,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해야 할 목록만 쌓여갔다.

 ‘막상 틀었는데 재미없으면 어떻게 해.’라는 마음으로 최고로 재미있을 영상을 찾느라 아무것도 못 본 체 ‘나중에 볼 목록’만 가득했던 내 OTT 페이지처럼.

     

 시간 부자라는 백수가 되고서도 이 시간을 절대 손해 보고 싶지 않아 불안했다. 사실 손해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지금 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 49라면, 하지 못한 일을 했을 때는 51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건 손해가 아니라 덜 이득인 셈이다. 

 물론, 어쩌면 흘려보낸 일들을 했을 때 더 재밌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닐 수도 없다. 반대일 수도 있다. 그건 알 수 없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차피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순 없으니, 평생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뭐, 지금 보는 영상이 조금 시시해도 ‘오늘은 그냥 좀 시시한 걸 보지 뭐. 내일은 더 재밌을지도 몰라.’하고 넘기는 게 낫다. 혹시 모르지. 용두사미가 아니라 사두용미인 명작을 만날지도.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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