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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Mar 13. 2024

온갖 종류의 사람이 필요하듯이

안에 머무는 사람이 있으면,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듯이요.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요. 말하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생각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 올려다보는 사람과 내려다보는 사람 (…) 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필요하니까요. 안에 머무는 사람이 있으면,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듯이요.”

<작은 책방 中 「일곱 번째 공주」>. 엘리너 파전





#1.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 새삼스럽지 않다.

 가치관, 성향, 재물, 거주지, 권력, 가족과 친구. 수많은 종류가 얽히고설켜 다시 수많은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을 만들어 낸다. 각자의 삶을 혀를 차며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닿고 싶어 아등바등 애간장을 태우기도 한다. 혹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뭐, 워낙 몇십억 명이 사는 세상이니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사람이 있는 거야 당연한 거다. 원래 세상은 좀 우당탕탕 요란스러워야 굴러가는 법이다.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그간 나는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바로 한 사람이 온갖 종류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 무엇보다, 그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2.

 물론 요즘은 워낙 다양한 공간(현실이든, SNS든, 각종 플랫폼이든)이 존재하는 만큼, 한 사람이 다양한 모습으로 각각의 세계를 누비기도 한다. ‘부캐’ 혹은 ‘페르소나’라고 칭하면서. 하지만 이와는 차이점이 있다. 페르소나가 본체가 있는 상태에서 쓰고 벗는 가면이라면, 한 사람이 온갖 종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본성, 본모습, 맨얼굴 자체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가깝다.

   

 성향이나 가치관의 중심이 확고히 잡혀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줏대 없이 애매모호하게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도전하는 삶이 진짜 멋진 모습이라고 여겼다가,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다. 미친 듯이 돈을 모으고 아침저녁으로 경제 뉴스를 보며,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여겼다가, 죄다 때려치우고 그냥 삼시 세끼 나를 책임 질 정도의 벌이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다 싶었다. 명확히 말하는 인간을 꿈꾸었다가, 침묵하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이런 온갖 나는 한순간에 하나로 있기도 했고, 동시에 두 모습을 지니기도 했다.

     

 이전의 나는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낯섦에서 오는 불안함이 아니었나 싶다. 확고한 삶의 방식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줏대 없는 삶, 나의 본질을 찾지 못한 삶이라고 여겼고, 빨리 ‘진짜 나다움’을 찾아 안정을 찾고 싶었다.




#3.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온갖 시기마다 나는 늘 진심이었다. 즉, 언제나 나는 그때마다에는 진짜 나다웠다.


 퇴사하고 몸과 마음을 갈아 넣었던 회사 생활을 떠올리면 참 미련하다 생각했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미래를 위한 경력, 맡고 있던 사업에 대한 책임감, 이 무력감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악바리. 분명 내 세상에 그 시기의 나는 필요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지금을 나중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온갖 종류의 사람이 필요한 게 세상이니, 멈추어 있는 나도 필요할 터이다.

 

 다시, 요즘의 나는 다시 흐르는 시간을 살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전 같았다면, 삶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알았다면서 결국 다시 자본주의 세상으로 돌아가냐며,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한 인간도 얼마든지 온갖 사람이 되는 게 당연하다. 아니, 오히려 필요하다.

 


         




#4.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안에서 기다리며 돌아왔을 때 문을 열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안에 머물며 생각이나 하는 때가 있으면, 밖으로 나가 우당탕탕 행동이나 하는 때가 있다.

 일을 하고, 새로운 길을 밟아보고, 탐스러운 과일과 아삭한 채소를 따오고, 바깥 이야기를 잔뜩 담아 가지고 와야 집을 유지할 수 있다. 한 편으로는 밖으로 나갔다가도 나를 잃지 않도록 가만히 중심을 지키고 있는, 가만히 있는 내가 필요하다.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밥을 할 수 있는 불을 떼고, 숙면할 수 있는 침구를 정리하고, 피곤을 풀 수 있는 향을 준비하면서.

      

 꼭 도전하는 자유로운 삶만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묵묵히 제자리만 지키는 사람만 있어서도 세상은 굴러가지 않는다. 나 하나의 삶도 세상이라면, 얼마든지 이랬다 저랬다 온갖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나다운 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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