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나의 흔적들
다 쓰기 전까진 괜스레 잃기 싫은 물건이 있다.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럴수록 더 각별해지는 것들. 내겐 립밤과 라이터가 그렇다. 하찮을수록 더욱이 아니 그래야지만 그 끝을 보려는 객쩍은 승부욕이 발동한다. 한편으로는 이만큼 특별한 게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귀한 물건은 애기씨처럼 내내 귀하기만 해서 그만한 대접을 받게 마련이니까.
시작은 립밤이었다. 분명히 집에 있는데도 자꾸만 또 사게 되는 상황도 물론 억울했지만, 그보다는 평소 내가 쓰던 제품이 아닌데도 기어이 또 사게 만드는 나 자신이 더 싫었다. 이토록 사소한 거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나중에 큰일은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문득 스치고 나서부터는 줄곧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반대쪽 주머니엔 혹 군대를 가지 않았더라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를 불티나 라이터다. 엄밀히 말하자면 새 담뱃갑에서 딱 세 개비를 피우고 나서, 입추의 여지도 없이 꼭 들어맞는 그 상태를 제일 선호한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결국엔 빈틈없이 채우고 마는 나는야 맥시멀리스트, 여백은 늘 그렇게 나를 자극하는 유혹이라 좀처럼 가만히 두고 음미할 줄 모른다.
한동안 쓸 수가 없었다. 어제 쓴 글이 성에 차지 않는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급기야 절필의 유혹이 찾아오기도 하니까. 뭘 하든 즐길 줄을 모르고, 잘하고도 싶어 하는 고약한 심보 때문이고, 높아지는 눈만큼은 쉬이 따라주지 않는 글이 아니 내가 더 미웠던 까닭이다. 그렇게 서서히 굳어가던 나를 거듭 깨뜨려가며 때로는 자각하고 대부분은 자학하는 와중에도, 이참에 다 깨트리지 않으면 영영 입자가 고운 사람이 될 수 없으리란 생각으로 이어지더라.
자학의 나날 끝에 나는 비로소 내가 놓아주어야 할 불씨들을 보았고, 이제는 다시 나아갈 시간이다. 분란의 씨앗들은 고이 묻어둔 채로. 내가 남긴 발자국 하나가 못내 아쉬워질 때도, 늦었지만 괜스레 발로 비벼서라도 그 흔적을 지우고 싶어질 때도, 아무쪼록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내디딜 한 걸음을 더 고심해 가며, 전보다는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싶다. 무심하게 걸어온 길은 터벅터벅 티가 나게 마련이니까.
설령 또 다른 좌절이 기다리고 있대도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차라리 마중을 나가야겠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다 쓰기 전까진 잊어서는 안 될 자욱한 나의 흔적들. 덕분에 끝을 보려는 대상만 더 늘어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별거 아니지만 그럴수록 더욱이 애틋해지는 것들이 있다. 하찮다고 할수록, 아니 꼭 그래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