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Part 1
하루아침에 어쩜 이럴 수 있어?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기다려 왔는데. 갑자기 막 싸늘해지려고 그러네. 조금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와줘서 정말이지 고마워. 내가 봄이를 더 좋아했었다는 걸 너도 진작에 알았겠지만 그래서 더 미안해. 네 생각이 어찌나 간절해지던지, 실은 올 여름 내내 그랬어. 간밤엔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자다가 새벽엔 좀 추워지길래 다시 꽉 닫을까 하다가도 굳게 닫힌 창 앞에서 혹시 네가 머뭇거릴까 봐 차마 다 닫지는 못하겠더라.
이번엔 네가 아무리 짧게 나를 스치듯 지나치더라도 단 한 순간도 춥다고 칭얼대지는 말아야겠다고 이 가을에 앞서 다짐해 본다. 겨울아, 네가 아무리 맹위를 떨쳐도 나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껴입고서라도 아이스 라테를 고수할 테다. 이제는 바야흐로 일 년 중 최소 다섯 달은 여름이라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때가 왔다. 이번 추석 연휴만 해도 그렇다. 차라리 두 번째 여름휴가라고 생각해도 될 만큼 혹독한 더위였으니까. 내년엔 진짜 삼척이나 한 번 더 다녀올까 봐.
길었던 추석 연휴를 틈타 우리가 여름부터 염원하던 거실 서재화 작업도 이제는 대략 끝이 보인다. 아내의 의견을 듣고 보니 나 역시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읽을 자리도 마땅치 않고, 쓸 자리는 더욱이 애매했기 때문에 쉽게 수긍이 갔던 터였다. 때마침 남아있는 브런치북 연재도 슬슬 부담으로 다가오던 참이었고. 다만 여름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동의하는 와중에도 단서 하나는 붙여두었다. 대신 구상은 내가 해보겠다고.
한국형 거실 인테리어의 패착은 뜻밖에 한쪽 벽에다 TV를 거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거였다. 사실상 가장 중요했던 첫 번째 질문에 무성의하게 답을 한 결과 반대편엔 당연히 소파가 놓일 수밖에 없다. 그 앞엔 적당한 소파 테이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 또한 줄곧 그렇게 지내왔듯이. 그래서 이번엔 역으로 생각해 보았다. 제일 넓은 공간을 괜히 죽여놓고 시작하지 말고, 소파를 센터에 먼저 놓고서 구상해 보자. 양쪽 벽에다 깊지 않은 가구들을 딱 붙여서 배치한다면 공간도 훨씬 넓어 보일 거다.
여느 일이 그러하듯이 실제 작업기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알맞은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이 관건이니까. 덕분에 그 여름에 나는 나무도 보러 다니며, 얼마나 많은 줄자질을 했던가. 이번에는 운 좋게 거실 서재화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얻었지만, 공간을 채울 때 내가 우선순위로 두는 건 언제나 오디오였다고 양심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최소한 염치는 있어 보이길 원해서, 다른 걸 다 채우고 난 다음 마지막에 살짝 토핑을 끼얹듯 어우러지기를 원한다. 좋아, 이번에도 자연스러웠어.
이제는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던 건지 후회스럽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피로도 습관이다. 그걸 핑계로 집에선 그저 늘어져 있기만 했었으니. 딴 데서는 공간의 중요성을 그리도 강조하고 다니면서 말이다. 부디 그랬으면 하는 내 바램이지만, 나는 아마도 지금 이 공간에서 예전보다 더 많이 읽을 것이며, 때로는 지금처럼 읽다 말고 떠오른 생각을 끄적이기도 할 것이며, 쓰다가 운도 따라주는 어떤 날엔 내가 모르던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이런 나라도 언젠가는 내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나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실은 다 그를 위한 일이다. 누가 나를 싫어하는 것쯤이야 지금도 개의치 않지만 훗날 그게 나 자신이 되는 것만큼 애석한 일도 없을 테니까. 오늘처럼 이렇게 서늘한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만 같다. 사람이 어쩜 하루아침에 이럴 수가 있는지 사뭇 나 자신이 표독스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 가을이 좋아서 마음을 쾅 하고 닫을 수도 없는 걸 어떡해.
그러게, 나 원래 봄을 더 좋아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