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요코
뭐 하나를 좋아하면 도무지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렇다. 재즈 하나만 듣더라도 기어코 아날로그까지 손을 대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지독한 덕후 기질의 소유자. 이뻐 보이는 오브제라면 당장은 쓸 데가 없더라도 미리 사다 두었다가, 언젠가는 그걸 제자리에 두고야 마는 인간. 사물의 제자리란 그렇게 이게 원래 여기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문장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걸맞은 문장 하나가 제자리에 놓일 때 비로소 좋은 글이 될 테니까. 좋은 말 대잔치야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그걸 죄다 끌어모은다고 해서 글이 좋아지는 건 아닐 테니까.
평소 독서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쓰면서는 더 좋아진 탓에, 한동안은 읽고 쓰는 행위에 깊게 파고든 적이 있었다. 이 책도 아마 한참 읽기, 쓰기 뭐 이런 걸 검색하던 그 시절에 만났을 거다. 뭐가 됐든 책부터 먼저 찾아보려는 먹물적 사고방식, 딱히 그런 것도 아니면서. 덕분에 지금도 내 책장 한편엔 그런 책들이 그득하다. 뭐 하나에 꽂히면 열 권 정도는 읽어줘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달리 방법은 없다. 와중에 가장 와닿았던 책은 단언컨대 이 책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개중에 가장 작고 얇은 책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책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하루아침에 해결하기는 어려운 진리로 귀결되는 반면에 오가와 요코는 고맙게도 훨씬 더 가볍고 현실적인 조언을 건네주니까. 쓰기란 조금씩 마음에 고인 생각에 다만 귀 기울이는 거라고.
이를테면 이 책은 17년을 작가로 살아온 저자가 여태 강연을 통해 밝혀온 읽기, 쓰기, 그리고 창작에 관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대상에게 풀어온 말들을 활자라는 형태로 정교하게 각인시킨 언어다.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질문에 대한 대답 스포일러랄까? 책을 좋아했던 한 소녀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작가가 되기까지 경험과 왜 읽나요? 왜 쓰나요? 어떻게 쓰나요?에 이르는, 읽다 보면 누구나 얻게 될 질문에 대한 섬세한 답이다.
이야기란 결국 인간의 필요로 인해 만들어졌으며, 작가로서 자신의 역할도 단지 “현실 속에 이미 있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찾아 부삽으로 광석을 캐듯 열심히 파내서, 거기에 언어를 부여하는 것” (62쪽)이라며 새로운 이야기란 결코 “내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있었다는 겸허한 마음 자세일 때, 진정한 소설을 쓸 수 있”(62쪽)을 거라는 17년 차 작가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는 고백을 곁들이면서.
그저 읽기를 좋아했던 한 소녀가 작가가 되기까지 책을 통해 비로소 “자기를 존중하면서 타인을 용서하고, 불운을 받아들이고, 우연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게”(135쪽)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도 책을 보며 “우는 게 싫지 않았습니다. 운다는 걸 알면서도 책을 펼쳤어요. 슬프다는 건 괴롭다는 뜻만은 아닌 듯합니다. 책을 펼친다는 것은 저쪽으로 가고 이쪽으로 돌아오고를 마음대로 반복하는 것”(110쪽)이었으니까요.
저자의 이런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왜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하물며 쓰게 되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독서의 효용이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무릇 인간의 사고란 운신의 폭만큼이나 갈수록 좁아지게 마련인지라, 혼자서는 절대 떠올리지 못할 뜻밖에 생각을 책으로 먼저 만나기 위해서. 평상시 미리 읽어 두었다가 정말이지 절박한 그때 필요한 생각 하나 떠올릴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책이란 가히 생각의 도구이며, 글이란 나눔을 위한 도구인 것만 같다. 읽고 생각을 거듭하며 나라는 필터로 재정립된 생각을 다시금 나누기 위해서라도 글이란 반드시 필요해지는 거니까.
“다음에 쓸 언어를 허둥지둥 찾으려 하지 않고 다만 귀를 기울입니다.”(9쪽) 쓰려거든 사람이 먼저 되라고 여느 책처럼 꾸짖기보다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답을 제시할 만큼 따뜻한 사람. 조금씩 마음에 고인 생각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거라고, 쓰는 건 그다음에 해도 될 일이라고. 그렇다. 우선은 마음속에 울리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그렇게 한동안 고이며 숙성된 생각이라야 간신히 글감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나는 정작 내 안에 있는 소리조차 귀담아듣지 않으면서, 남들은 내 글을 봐주길 바라며 채 고이지도 않은 생각을 잘만 써 내려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욕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과연 그 생각이 충분히 고일만큼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던 걸까? 사고가 얕은 나머지 욕조가 찰랑거리는데도 어쩌다 한 번쯤은 그럴싸한 결과물이 얻어걸리기만을 바래온 건 아니었을까?
누구든 읽다 보면 으레 독서에 관한 책을 찾게 될 거라고 믿는다. 더 잘 읽고 싶다거나, 혹은 쓰고 싶어질 테니까. 그럴 때 꺼내보면 좋을 책. 읽는 이가 맞이할 또 하나의 숙명이 있다면 그건 결국 쓰게 될 거란 점이다. 혹시나 글이 잘 안될 때 다시 꺼내 봐도 좋을 책. 지금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아마도.
『첫 문장이 찾아오는 순간』 오가와 요코
* 본 콘텐츠는 (재) 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의 「2024년 뉴플랫폼 퍼블리싱 지원사업」에 선정,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