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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일어난 일

김창열

by 청일


1. 작가소개 — 김창열(金昌烈, 1929–2021)


김창열은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 미술사에 각인시킨 대표적 작가로, 특히 ‘물방울 회화(Drop Painting)’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물방울 하나를 단순한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라

침묵, 치유, 존재의 근원성을 담은 상징으로 다루었다.

투명한 물방울을 캔버스 위에 집요할 만큼 반복해 그려내며, 인간의 상처·기억·시간을 정화하려는 듯한 작업을 이어갔다.


1970년대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그의 물방울은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조형성이 결합된 독자적 세계를 완성했다.

물방울은 김창열에게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자

“삶의 고통을 덜어내는 의례”였다.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물방울 앞에서

끝없는 명상과 사유의 시간을 보낸 작가로 기억된다.


2. 작품 설명


짙은 먹빛의 화면 한가운데,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고요하게 떠 있다.

물방울은 마치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작은 존재처럼 빛을 머금고 있으며,

그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는 밤의 정적과 깊이를 더한다.


이 작품에서 물방울은 기억, 상처, 호흡 같은 가장 내면적인 것들의 실체화이며, 어둠으로 가득한 화면은 마음속의 깊은 공간을 상징한다.

극도로 절제된 구성 속에서 물방울 하나만을 남김으로써, 김창열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울림”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이 그림은

고요한 밤의 침묵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 하나의 감정, 하나의 기억을 물방울이라는 상징으로 응축해 낸 작품이다.


3. 나의 감상


의미는

찾는 자에게만 보인다.

같은 사물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 바라보고, 느끼고, 자기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다.

사물은 그저 놓여 있을 뿐이고,

그것을 세계로 확장시키는 일은

결국 의식의 선택이다.


창가에 맺힌 물방울,

떨어지는 빗방울,

우리가 살아오며 무심히 지나쳐온 수많은 물의 형상들.

나에게는 늘 ‘물의 상태 변화’ 정도에 불과했던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평생을 걸어 탐구할 만한

고요한 우주가 되었다.

사물은 같아도 응시의 깊이는 다르다.

그 차이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업으로 삼아 살아갈지 고민한다.

무슨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갈지

처음의 단계는 대개 혼란과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한 번 선택이 이루어지면

삶은 어느 방향으로든 한정된 결을 갖게 된다.


누구나 하나의 주제만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특히 나처럼 수없이 헤매고 돌아 나오기를 반복하는

‘프로 삽질러’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는 실패의 표지가 아니라,

세계와의 다양한 접촉을 통해

자기만의 깊이를 찾으려는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끔은

단 하나의 세계를 파고드는 사람들의 존재 앞에서

존재의 밀도를 배운다.

오늘 내가 본 물 한 방울처럼—

선택과 집념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단단한 사유의 결정체.

물방울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은 작가의 삶은

언뜻 좁아 보이지만

오히려 그 내부에서는 무한이 자란다.


나에게 그 길은 쉽지 않다.

아마도 한 가지에 올인하는 삶은

내게 허락된 방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길을 건너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만은 분명하게 내 안에서 흔들리고 있다.


오늘 본 물방울은

그 흔들림 속에서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의식의 깊이를 잃지 않는다면

삶 역시 단단해질 수 있다는 깨달음.


물 한 방울이 내게 남긴 것은

사물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의미를 발견하려는 나의 태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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