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만난 미쿠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각인된 이 문장은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해 주었다.
시간 낭비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성격에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다 보니
매 순간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가끔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화나게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장점만 있을 수는 없듯이,
시간을 아끼다 못해 분 단위로 사는 삶에도 조금씩 금이 갔다.
어느새 내가 시간에 끌려가고 있었다.
여행 작가 손미나는 한 강연에서 아프리카 원주민 이야기를 한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데리고 탐사를 시작한 서양인은
성공적인 탐사를 위해 매일 정글 속으로 쉬지 않고 이동한다.
며칠을 계속 이동했을까, 원주민은 털썩 자리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자고 말한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지연된 일정에 화가 난 서양인은 원주민에게 화를 내며 다시 이동하자고 재촉한다.
원주민은 말한다.
"아직 제 영혼이 따라오지 못했어요. 영혼을 기다려야 해요."
정신없이 인턴과 과외, 알바와 각종 대외 활동을 끝내고 나니, 어느새 여행 날짜가 당도했다.
분 단위로 살아가는 일상에서 대충 세운 계획으로 출발은 할 수 있게 되었으나,
내 영혼은 전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여행을 갔으면 그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건 경험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부랴부랴 출발한 일본 여행에서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혼을 태웠다.
친구들이 개강하러 공항길에 오른 뒤, 나는 혼자가 되었다.
내게는 귀국 비행기도 없고, 처리해야 할 문서도 없으며, 당장 오늘 무엇을 할지 계획도 없었다.
호텔 방의 흰색 침대 시트는 여전히 일본의 정갈함을 보여줬고,
창가 너머로 보이는 지하철은 여전히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카우치서핑을 통해
도쿄에서 남은 시간 머무를 곳을 찾게 되었다.
한국인 남편과 일본인 아내 슬하에
귀여운 두 꼬마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짧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안내된 방에 들어갔다.
각종 장난감과 그림들로
아이들의 향기가 가득한 방이다.
나는 그동안의 피로가 쓰나미처럼 쌓였다는 듯,
이불도 없이 바닥에 누워 잠을 잤다.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낮잠이었다.
잠결에 눈을 잠시 뜨니, 미쿠(아내)는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
따뜻했다.
이불이 따뜻한 게 아니라, 미쿠의 마음이 따뜻했다.
따스한 손길로 이불을 덮어주는 감각을 떠올리며 다시 잠에 들었다.
조금의 피로를 잠재운 뒤 거실로 나왔다.
미쿠는 나를 걱정했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아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거라니!
혹시나, 아픈 곳은 없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하며 걱정을 덧붙였다.
만난 지 몇 시간 안 된 낯선 이의 집에서
짐을 다 풀어놓고 잠을 자는 것은 위험하다고.
만난 지 몇 시간 안 된 낯선 이는
나를 위해 이불을 덮어주고 혹시 아픈 곳은 없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쿄의 유명한 초밥집에서 사케와 함께 초밥을 먹고, 일본 맥주와 함께 말 사시미를 먹는다.
식당을 오가며 남편은 아들과 함께 이미 저 멀리 걷고 있고,
나는 미쿠와 그의 딸 리나와 함께 발을 맞춰 걷는다.
아빠와 아들은 애정을 표현하기에 부끄러운지 서로 말없이 거리를 두며 걷는다.
그러나 넘어지지 말라며 툭 내뱉은 말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새어 나온다.
미쿠와 나는 그들을 보며, 옆에서 재롱을 부리는 리나를 보며, 서로 미소 짓는다.
미쿠와 남편은 소개팅을 통해서 만났다.
남편은 '망할 놈의 추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미쿠는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 속내를 묻지 않았지만,
방에 걸린 옛 사진과 결혼사진을 보면 두 분의 결혼 생활을 행복했음에 틀림없다.
미쿠는 줄곧 젊은 이가 혼자서 세계를 돌 거라는 사실에 내게 응원을 보내면서도 걱정을 표한다.
나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은
어느새 집으로 가는 달빛 아래
내 손을 잡으며 가고 싶다는 손짓으로 바뀌었다.
리나와 나는 총쏘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우리는 웃음을 지었다.
청명하게 뜬 달 아래에서
리나를 꼭 안아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리나는 나와 같이 목욕하고 싶다며 미쿠에게 징징댔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안 된다고 말하는 미쿠에게
괜찮다며 되려 나를 가족으로 받아준 리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목욕을 했고, 따뜻해진 몸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동화책을 읽었다.
피곤해하는 나에게 쉬라며 리나는 이불을 펴주었다.
리나 가족의 따뜻함에 내 마음은 온기로 가득 찼다.
어느새 한 가족이 된 미쿠네와 마지막 밤이 되었다.
도쿄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밤늦게 들어오니, 미쿠는 나를 걱정하며 자지 않고 있었다.
하루 종일 육아로 인해 지친 눈은 이미 졸림이 한가득한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안심의 미소를 짓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말한 내게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사실이냐고 묻는다.
여행 일정이 너무 빠듯하지는 않은지, 나의 건강은 괜찮은지 걱정하며
밤이 늦어서까지 가는 차편을 알아보고, 필요한 서류를 위해 근처 편의점에도 다녀왔다.
우린 짧게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내게 앞으로 여행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달은 어느새 반대편으로 넘어가 새벽 공기가 창문 너머로 느껴졌다.
도쿄타워는 언제나처럼 빨간색 빛을 보이며 새벽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내게 따뜻한 걱정과 응원을 아끼지 않은 미쿠.
미쿠는 결혼을 한 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매일 아이들만을 바라보며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도 그는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
낯선 이를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은, 나에게 도쿄를 따뜻한 온실로 가득 차게 했다.
미쿠에게 '삶의 이유'를 물었다.
미쿠는 깊이 생각해 보더니, 나중에 대답해도 되냐고 물었다.
도쿄를 떠나 새로운 땅에 발을 올리니, 미쿠에게 연락이 왔다.
가족들과의 행복이
제 삶의 이유예요.
그렇지만,
아이들도 자라면 곧 떠나니,
저도 저만의 데이지를
찾아봐야겠네요.
데이지 덕분이에요.
미쿠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어머니였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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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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