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데이지] 0화
당신은 왜 사는가?
If we possess a why of life we can put up with almost any how
Twilight of the Idols - Friedrich Nietzsche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한다.
다시 한번 물어보겠다. 당신은 왜 사는가?
대답이 안 나오는 사람을 위해 다시 질문해 보겠다.
당신이 겪은 힘들었던 상황을 떠올려보라.
외롭고,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 눈물로 지새운 그 밤을 떠올려보라.
당신은 그 상황을 어떻게 견뎠는가?
여기서 혹자는 필자에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럼 당신은 왜 사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곧바로 하기 전에,
어릴 적 필자를 불러내 그 소녀에게 들을 대답을 먼저 들려주겠다.
"저는 꿈을 꾸기 때문에 살아요."
내게 삶을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레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라는 문장으로 연결되었다.
문장 끝의 질문은 곧 '나는 이런 삶을 살아야지'라는 의지로 연결되었다.
삶을 꿈꾸고, 꿈꾸는 그 삶을 현실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살아왔다.
그중, 어릴 적부터 강렬하게 꿈꿔온 삶이 있었다.
'1년 동안 세계여행하기'
중학생이던 나는 젊은 나이에 세계를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꿈을 묻는 책을 우연히 읽었다.
순식간에 책을 흡수하면서, 저자와 같이 성인이 되어 전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는 나를 상상했다.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구의 에너지가 작동했는지,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기 위해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세계를 여행하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설렘에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생긴 나의 커다란 꿈은 줄곧 내 곁을 지켜왔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 소녀가 꿈꿀 때의 심장박동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여행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뛰었다.
나는 꿈을 꿨고, 그 꿈은 내게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었다.
내 삶의 이유는 나의 꿈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두가 나처럼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그건 큰 실수였다.
수능이라는 큰 산을 넘고,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는 증서를 받고 나니 자유라는 가치를 선물로 받았다.
법적으로 인정한 성인이 되어 내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왔다.
하고 싶던 일을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보고 싶은 책과 영화는 닥치는 대로 봤다.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듣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날에는 안 갔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유라는 하늘 앞에서 나는 독수리같이 힘껏 날갯짓을 했다.
자유라는 가치를 양력 삼아 내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며 힘껏 날갯짓을 했다.
언제나 자신이 더 높은 곳을 날 거라고 믿던, 꿈꾸는 독수리였다.
파란 하늘의 스케치북 위에 따뜻한 햇살을 받은 빛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날갯짓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건물과 사람들의 모습은 마을의 움직이는 모형과도 같아 보였다.
깃털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은 내게 생기를 선사했다.
그야말로, 부화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끊이지 않는 웃음꽃을 갖고 비행 중에 만난 다른 독수리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꿈을 꾸고 있니?
너에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며, 그 가치를 기반으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거야?
꿈에 가득 찬 생기 있는 목소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돌아왔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야? 우리 앞에 있는 일이나 신경 쓰자.
이어 다른 독수리도 대답했다.
뭘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냥 남들처럼만, 그저 남들처럼만, 평범하게 살고 싶네.
또 다른 독수리도 대답했다.
난 늦었어.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너도 이제 성인이잖아.
스쳐 지나가는 대화의 한 줌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나의 날갯짓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성인이라는 명찰을 갖게 된 사람들은
어른이라는 무게를 지기 위해 조금씩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어가고 있었다.
살아가야 한다는 명목아래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도,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도 고민하지 않은 채
'현실'이라는 표지판 앞에서 그저 시속 180km로 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지도 모른 채.
아무도 자신의 꿈을 모르는 사회에 온 몽상가는
꿈을 가진 자신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많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나는 현실과 타협한 수많은 친구들,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이들,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추억 속에만 보관해 둔 그들을 보았다.
어릴 적 설렘에 잠들지 못한 시절을 가슴에 담아 온 나에게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조금씩 그들을 이해하는 내 모습은 내게 허망함을 안겼다.
인턴 생활을 오가는 1시간의 지하철 안에서
목적 없는 시선이 허공을 향해 떨어지는 걸 느낄 때마다,
어느새 어른들의 무거운 눈꺼풀을 보고도 모른척할 때마다,
서서히,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나 자신을 볼 때마다,
삶에 대한 회의감은 조금씩 내게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우울이라는 심연으로 시나브로 내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모르고, 그저 생존을 해오는 이들은, 어떻게 삶을 살아가지?
가슴 뛰는 무언가 없이 오늘도 그들이 사회에 몸을 던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저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습관일지라도, 그 습관이 멈추지 않는 원동력은 뭘까?
만원인 퇴근길에 터덜터덜 몸을 싣는 수많은 사람은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그들의,
삶의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다짐했다.
내 삶의 이유였던 나의 꿈,
세계여행을 떠나자.
세계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물어보자.
그렇게,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희망'이라는 꽃말을 가진 데이지와 함께.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빅터플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