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메르신에서 만난 데프네
* 본 글은 대학 친구 데프네와 나눈 대화를 그대로 넣은 글로 상당히 긴 글입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찾아와 조금씩 흡수하며 읽기를 권장합니다.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의 말
이스탄불 공항을 나와 메르신으로 가는 9시간 버스에서
나를 가득 채운 마음은 오로지 설렘뿐이다.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사막여우의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사막여우는 4시에 올 어린 왕자를 3시부터 기다렸다면,
나는 12시부터 기다린 기분으로 설렘을 가득 품는다.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메르신으로 향하는 길.
대학에서 만난 소중한 친구, 데프네를 보러 가기 때문이다.
터키 사람인 데프네는 한국 유학길 중에 나와 만났다.
"데프네, 난 세계여행을 할 거야.
훗날 터키에서 보자!"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데프네에게 장난스레 말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저 스치는 말이 곧 현실이 된다는 사실은
선물을 가득 담은 산타의 보따리처럼
기대감으로 가득 찬 마음이 된다.
그가 보고 싶고
그의 집에 가고 싶고
그의 가족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
데프네를 향한 마음을 가득 품는다.
부풀어진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온 데프네를
달려가 껴안는다.
"데프네!!!!!!!!""여기가 터키라니!!!
우리가 만나다니!!!"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첫 순간이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스친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의 장난스러운 말이
현실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채
우린 반가움을 불꽃처럼 터뜨린다.
부드럽고 가벼운 포근함이 느껴지는 데프네 집은
메르신에 머무는 동안 가족같이 따뜻함을 안겨준다.
재회의 흥분을 잠시 가라앉힌 뒤,
데프네 방에서 어린 시절의 흔적을 함께 본다.
데프네가 학창 시절에 공부했던 한국어 학습지를 보자니
수험생 시절, 수능 공부하던 무수한 학습지가 떠오른다.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가서 한국인 친구를 사귀는 꿈을 꾸곤 했는데,
지금 한국인 친구가 우리 집에 와있다니!"
"나에게도 이 순간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순간이야.
어릴 적 나를 설레게 했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던 바로 그 순간.
그곳에 내가 지금 서 있어."
한국 유학길을 꿈꾸던 소녀는 유학생이 되어 한국인 친구를 집에 초대했고
세계 일주를 꿈꾸던 소녀는 세계 여행자가 되어 친구 집에 놀러 간다.
꿈 한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 둘은
눈앞에 펼쳐진 순간을 믿지 못한다.
"지금도 널 보고 있지만,
이곳에서 널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오랫동안 꿈꿔온 꿈을 이루어내고,
이루어낸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순간.
오랫동안 꿈꿔온 지난 시간이
꿈을 이뤄낸 순간을 믿기지 않게 만들어주고,
이뤄온 순간을 더욱 값지게 만들고,
눈물짓게 만든다.
우린 2박 3일 동안 메르신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찬란한 순간을 함께한다.
우리들의 잊지 못할 대화들과 함께.
데프네:
"나는 외국인이기에 졸업 이후에도 한국에 남으려면 직업이 있어야 해.
그래서인가, 나는 원래 압박을 받는 사람이 아닌데,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생겼어.
조금씩 현실을 보게 되는 거지.
나도 아직 (진로에 대해) 대답이 안 나왔는걸.
이런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그렇지만, 올해는 그런 압박감을 줄이며
편하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어.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일을 만들어 나가야 하지.
그게 나의 책임이니까.
터키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
물이 흐르면서 결국에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대학의 후반부를 맞이하는 데프네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친구의 진솔한 고민 너머로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온다.
살며시 들어오는 햇살,
데프네 부모님의 요리하는 소리,
잔잔한 공기까지.
데프네: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
영화를 찍겠다는 것은 영화에 대한 큰 열정을 가져야 해.
영화는 좋은 동료가 있어야 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고."
예진:
"맞아. 그 사람들을 총괄하는 지도력도 필요해.
긍정적인 마음가짐도 있어야 하지.
긍정적인 마음을 사람들에게 느껴지게 해야 하는 것도 물론이지.
돈도 있어야 하지.
그렇기에, 큰 열정이 필요한 직업이야.
너에게는 그런 큰 열정이 있다고 생각해?"
데프네:
"나는 열정은 없지 않지만,
얼마나 큰 열정인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렇지만, 매력이 느껴지는 건 확실해.
좀 더 살아봐야겠지.
더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해야지
내가 무언가를 나오게 할 때쯤,
나는 그때 확신을 갖고 주변 사람도 만들어 함께 나아가는 거지.
서울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서울도 작은 도시야.
도시는 크지만, 사람은 작잖아."
불안하고,
무언의 압박이 있는 시기이지만,
지금 우리이기에 받는 이 불안함이
지금 이 시기이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
고민과 불안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이 참 좋다.
산뜻하고,
편안하고,
안락하며
따뜻한 데프네의 방.
그 순간을 놓칠세라
온 힘을 다해 음미한다.
차가운 계곡물은
물속에 있으면 화상을 입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간 보듯이 손과 발을 담고 나면
차갑기 그지없는 계곡에 겁을 먹기 마련이지만
거침없는 두 청년은 뜨거울 정도로 차가운 계곡에 입수한다.
"우아아!!"
차갑게 몸을 관통하는 냉기는 몸속으로 퍼져나가며
이내 점차 편안한 온도로 변한다.
계곡물은 작은 파동을 만들어 잔잔히 머무르며
우리가 만드는 물결에 일렁이며 춤을 춘다.
투명하고 시원한 계곡물에 함께 물장구를 친 뒤,
올리브 나무 옆에 앉아 여유를 음미한다.
선선하게 흘러드는 바람을,
따사로이 내려오는 햇살을,
지금 움켜쥔 따뜻한 커피 한잔을 느낀다.
농장에서 직접 따온 과일과 터키 음식을 펼쳐놓고
선선한 바람을 맞이한다.
'음 음 음'
이 순간이 가져다준 행복을 음미하며
우린 대화를 시작한다.
예진:
"어렸을 적에는 사람을 평가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했었어.
과거 나는 상대방에게 좋은 점만 생각하고 모두와 친해지려고 했었지.
사람을 평가하고 나쁜 점을 생각하는 게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렇지만, 이게 나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나를 지키는 방법일 수 있겠더라고.
그 사람이 나쁘다고 해서 배척하는 게 아니야.
단지 나와 다르므로 거리를 두는 것뿐이지.
이걸 깨달아서일까,
이익 관계라는 잣대 없이 사귀는 사람들이 소중해.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초등학교 때 친구 사귀고 좋아하고 막 그러는 것 같아.
자기가 잣대 없이 그냥 아무 일 없이 사귀었던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거지.
그런데 나는 과거의 추억을 나눌 사람과 어울리는 게 그다지 재미있지 않아.
왜인지를 고민해 봤어.
아무래도 나는 과거 보다 미래 보는 게 더 좋아서인 거 같아."
데프네:
"내가 아는 오빠도 너랑 비슷해.
오빠는 사람을 이렇게 친한 친구를 사귈 때 뭘 보고 사귀는지 물어보니
오빠는 말하더라.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
과거를 좋아해도 앞을 보는 사람.
앞을 본다는 게
앞만 보고 달린다는 게 아니라
희망적으로 미래를 그리는 사람을 뜻해.
삶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갖는 거지.
나도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긍정적이었으면 좋겠고
앞을 보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나도 그 사람들한테 힘을 받아서라고 말하더라고."
예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데프네:
"'미래'라는 단어를 말할 때 가지치기로 생각나는 단어를 생각해 봐.
직업 돈 경제...
우린 왜 미래와 관련해 이런 단어를 떠올리는 걸까?
미래라고 하면 창의적인 생각들도 존재할 수도 있잖아.
좀체 떠올리기 힘들지.
왜냐하면 이 시스템 속에서는
미래라는 게 돈이 있어야 미래가 보이니까 말이야.
돈이 있어야 가능성이 있고, 살 수 있으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아.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이 시스템이 싫어.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우면 계속 꾸준히 생각해야 하는 거야.
미래라고 생각했을 때 다른 단어들을 떠올려봐,
나의 나이 많은 시절도 나한테 미래지.
근데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하지?
'나도 늙겠구나.'라는 생각에서 미래를 떠올렸을 때 왜 못할까?
왜 우리는 미래를 떠올릴 때 돈, 직업만을 떠올리는 걸까?
이런 생각은 질문을 만들지
인간의 가치가 뭐지?
나의 가치가 뭐야?"
옷을 빌려준 데프네와 한껏 꾸민 채 집을 나선다.
마리아나 쇼핑센터와 바닷가 근처를 걷고
한 카페에 앉아 터키식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다.
사르르 녹는 아이스크림에 행복해하며 대화를 시작한다.
예진:
여행하면서 이런 생각도 해,
어떤 나라에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아니면 별로 살고 싶지는 않지만
이 나라에서는 짧게나마 살 수 있겠다~ 이런 생각들 (웃음)
데프네:
내가 터키 사람으로서, 지금 에르도안의 시대에 살면서 나도 느껴.
그래서 내가 한국으로 간 이유 중에 큰 이유기도 해.
전에도 말했겠지만 지금 나의 직업은 학생이잖아.
터키에서는 학생으로서의 가치를 못 느껴.
바꿀 수 있으면 바꾸지.
나한테 훨씬 더 가치를 돈 가치를 지워준 한국으로 가서 장학금도 잘 받고,
그걸로 성취감도 얻는 거지.
나는 예술적으로 한다면 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예진:
지금은 늦었다고 생각해?
데프네:
사실 안 늦었지.
그런데 예진아,
나는 내 영혼이 너무 20살 같지가 않아..
생각이 너무 많아.
예진:
문제가 아니야 좋은 거 아니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그걸 느끼고 그 능력을 키우는 거지.
나의 능력을 더 키워서 나를 표현하는 정체성과 수단으로 만들어야겠구나.라고 말이야.
우리가 미래에 어떻게 될까?
우리가 뭘 해도 좋은 선택일 것 같아.
우리가 엄청나게 큰 사람이 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빛날 것 같아.
저 자리에서 빛날 수도 있고 저 자리에서도 빛날 수도 있고.
사실 다 똑같은 거야.
물론 하나는(큰 사람)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겠지만
그저 주변사람들에게 잔잔한 영향을 주는 것도 참 멋진 일이야.
그런데 우리가 벌써 3학년이야.
지금 당장 못 찾는다고 해도 잘못은 아니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계속 우리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걸 결정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찾아나가서 또 바꿀 수도 있는 거고.
그냥 일단 마음 가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데로 하고 싶어.
데프네:
이렇게 얘기해서 더 마음이 더 좀 안정되는 것 같아.
사람은 혼자서 생각할 때는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미쳐 나가는 게 있잖아.
이렇게 너랑 나랑 이렇게나 비슷한 고민 속에서 이렇게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 속에서 지금 살고 있다는 게 보니까 난 너무 좋아.
예진이 부모님도 예진이를 잘 키우려고 노력 많이 하셨겠다.
예진:
자기 전에 부모님께 사랑한다 하고 자야겠구나.(웃음)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침대에 가기 전
데프네와 나는 터키식 홍차를 마시며 밤을 마무리한다.
각각 홍차를 우려내고 물을 끓이느라 두 개로 구성된 주전자를 설명하며
데프네는 고요하게 우려낸 홍차를 내 앞으로 가져온다.
유리로 울퉁불퉁하게 생긴 찻잔을 보며
터키식 홍차를 음미한다.
진하게 우러난 홍차를 마시며 데프네는 우쿨렐레를 연주한다.
데프네:
"과거에는 이것저것 관심도 있었고, 또 여러 분야를 잘하는 것 같기도 했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거든.
나 해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든가.
도전적이었지.
나중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뭔가 나는 크게 될 것 같은 사람이다.
근데 이 생각이 내게 스트레스가 된 거야.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변한 거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나를 그냥 흐름에 넣기 시작했어.
나는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
너는 크게 되면 크게 되는 거고, 크게 안 되면 크게 안 되는 거지. 그래도 괜찮아.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이것저것 능력이 있다고 해서 네가 크게 나와서 인류를 구해주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그래서 그냥 나를 놓았어."
예진:
"너를 놓은 게 아니라 너를 안아주는 거야.
더 오랫동안 지속하도록 너를 껴안는 거야."
데프네:
터키에서 유명한 한 시인은 정치적 발언으로 감옥에서 수십 년을 보냈어.
감옥에 갔으니 남는 게 시간인 거야.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많고 힘도 많고.
감옥에서 지내며 시인이 쓴 시집은 훗날 정말 유명해졌어."
데프네는 시인의 인상 깊은 구절을 읽는다.
"이 삶을 그대로 안아주고
이 삶을 그대로 좋아하겠다는 그 시인.
그 시를 감옥에서 쓴 거야. "
예진: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시간.
정말 중요한 시간인 거 같아.
서울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여행을 처음 시작한 2월 말에,
어느 순간 이 바람을 맞는데 내가 언제 이 바람이 따뜻하다고 생각을 입고 있었지? 란 생각이 들더라.
물론 한국에서 공부만 한 게 아니니까, 노는 시간도 많았지만,
가만히 멈춰서 사색하는 시간, 온전히 바람을 느끼는 마음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
데프네:
"생각하는 힘과 관련해서는 미디어가 문제지"
예진:
"여행하면서 완전히 미디어와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이 진짜 많더라.
그들은 정말 자유로워 보였어.
그게 신기했어.
우리는 미디어 세상에서 다 같이 살고 있는데,
저 사람은 자신의 세상에서 저런 삶을 살 수도 있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엄청 편하게 살지도 않아.
그 사람도 공포심을 가질 테고, 고민이 있을 테고 긴장할 테지.
삶의 도전이 앞으로 얼마나 많을 텐데.
단지 미디어와 멀어진 채로 살아가는 삶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거야.
그럼 나는 왜 이런 방식의 삶을 택한 걸까?
내가 선택한 삶은 이런 모습인데, 그 이유가 뭘까?
이 생각을 자주 하면서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뭔지를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물어보고 있어.
데프네:
"나는 나를 위해서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싶어.
나를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을 내가 알아차리고 그 힘에 굴복하지 않으니까.
선택할 자격을 스스로 만들어줘야 해.
이것도 나의 책임이고 그럼 그걸 만들려면 내가 생각할 힘을 키워야 해.
충분한 고민을 많이 해야 쌓이는 거 같아. 그렇게 쌓인 토대에 무언가를 올려두는 거지.
예진이도 세계 여행을 하면서 그 베이스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예진:
"여행하면서 다른 사람들 삶의 형태를 마주하다 보니 되게 재밌어.
내 삶도 반추하게 되고
다른 삶의 형태도 이해하고 공감하게 돼.
나는 어떤 삶을 원하지? 도 고민하게 되지.
이미 자신의 삶을 쭉 살아온 이의 삶을 보면서는
젊었을 때 그 사람이 했던 생각으로 살면 훗날 지금과 같은 삶으로 살겠다는 교훈도 얻고.
무엇보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할까에 대해서 계속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되게 재밌었던 사실은 사람들의 삶은 국가, 종교, 민족에게 많은 지배를 받고 있다는 거야.
당연한 사실인데,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니까 또 다르게 다가오더라."
데프네:
여행이라는 게 그 점이 공통점이야.
여행은 집에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문을 열어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제 스토리의 시작이지.
그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거니까
너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거야.
그게 토대가 되는 거지.
자기 인생에서 여행할 줄 알아야 하지.
예진:
"자기가 그대로 살고 있는 삶 속에서도 여행할 수 있지.
일상에서의 조그만 변화가 있잖아.
혹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만 봐도 똑같은 일상을 새로운 여행으로 살 수 있지."
데프네:
그런 방법들이 쉽지가 않은 것 같아.
일상을 빠져나오려면 그 일상에서 큰 변화 점이 있거나
사고와 같이 삶에 큰 사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작은 것들로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아.
사람들은 변화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안정적이고 편한 삶만 원하지.
그러면서 자기가 스스로한테 멀어지는 거야.
이상에 더 가까워지고 그럼 사는 의미가 뭐가 있겠어?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뭘 하러 왔는데?
나는 그런 생각들이 너무 많았거든.
죽음에 관한 생각도 자살에 관한 생각도 되게 나는 강했어.
왜냐하면 너무 무의미한 삶을 내가 느끼고 있었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어.
종교도 어느 순간부터 없어지고 타성에 빠지면서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거 같았어.
살아갈 의미가 있어야 살 수 있는데 말이야.
이후에 천천히 마음먹었어.
나는 그냥 이 삶을 이대로 받아들이기로.
이것 자체를 하나의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이 과정을 즐기겠다고 생각해.
이게 내 인생의 의미야.
내 인생의 의미는 나의 가치고,
데프네라는 사람의 가치가 뭔지를 알아가는 거지.
그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내 목표고,
내 인생의 의미야.
너무나도 행복하고, 꿈만 같았던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밤이 찾아온다.
데프네와의 시간은 여행 이후, 미래에 대해 자각을 시켜준다.
생각이 비슷한 데프네와의 대화는
그저 생각으로만 갖고 있던 둥둥 떠 있는 퍼즐은
구체적인 감각으로 나타나 눈앞에서 맞춰진다.
이 밤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데프네와 저녁 인사를 나눈 뒤 방으로 돌아온다.
밤의 온기를 끝내고 싶지 않아 괜스레 테라스 너머 메르신 일대를 바라본다.
'중학교 때 꿈꿔온 세계여행을 지금, 이 순간하고 있다니.
어느덧 5개월이 되었고, 앞으로 7개월 정도 남았다.
그 이후, 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초록색 지붕의 모스크는 어두운 메르신 일대에 빛을 비춘다.
틀어놓은 잔잔한 노래를 배경으로 주황 불빛의 가로등을 바라본다.
주황 불빛들로 하늘의 구름이 빨갛게 물든 밤하늘,
거리 곳곳엔 주황 가로등이 온 도로를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졸림과 피곤이 행복과 공존하며 몽환적인 순간을 연출한다.
그저 주황 불빛을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로도 이 순간이 좋다.
오랜 꿈을 이루어내는 지금, 이 순간,
여행 이후의 삶을 고민하고 나아가고자 상상하는 이 순간이 좋다.
갈색의 홍차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듯
따뜻한 순간을 품으며 밤공기를 들이마신다.
음 음 음...
데프네와의 마지막 밤,
그에게 함께 산책하러 가자고 물어보니
온 가족이 다 함께 나온다.
하루 종일 터키 일대를 소개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졸린 눈을 비비며 바닷가에 나온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모두가 하품하고 비몽사몽이지만
터키에서 함께할 마지막 밤이란 사실은 우리의 피곤을 꺾지 못한다.
앉아서 쉬는 가족을 뒤로
나와 데프네는 바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메르신의 밤공기를 함께 음미한다.
지중해를 밝히는 윤슬을 바라보며 나는 말한다.
예진:
그냥 숨을 쉬는 거랑 삶을 사는 거는 완전히 다르잖아.
근데 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곧 의미를 찾는 그 과정인 거니까.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가는 거지.
너도 너만의 방법을 찾아간 거고.
삶을 살아가는 나의 의미가 뭘까,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삶이자 여행이지.
나도 여행하면서 내 삶의 의미, 나의 희망이 뭔지를 찾아가고 있어.
여행하면서 사람들에게 묻는데,
다들 대답할 때 다른 답들을 말하지만,
결국 공통으로 다들 같은 삶의 의미를 지향하더라고.
데프네:
"맞아.
생각이 있어야 살아가게 되니까.
무의미하다면 살 수 없어. 미쳐버리게 돼.
우리는 우리 스스로한테 물어봐야 해.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정말 스스로 그거를 스스로 한다면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 한다면 좋은 거지.
예를 들어 누군가 너의 가치가 이거고 너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누가 나를 조종하는 것처럼 살지 않아야 해.
우리의 생각으로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아야 해.
사실 이게 쉽지 않지.
생각할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끝이 없어서 그래.
이 힘의 끝이 없어서, 생각할 힘을 키우면 키울수록 끝없이 커지는 것 같아.
더 좋은 길들이 보이고 좋은 것 속에서 더 좋은 것을 찾고."
데프네는 최근에 자기가 깨달은 이야기를 했고,
그 깨달음은 내가 여행하며 얻은 깨달음과 동일하다.
'나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없구나.'
'지금 내 나이대 사람 중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더욱 없구나.'
우리가 나누는 이 대화처럼,
삶에 대해서,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고민해 나가는 것이
나의 능력이구나.
생각들을 나누고 나만의 정의를 세우고 삶을 생각하는 것의 가치.
그 가치를 나눌 때 행복해하는 나 자신.
이 생각을 공유하는 우리 둘의 온도가 참 좋다.
다시 메르신 데프네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족들이 다 같이 이야기 나누며 화목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문득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울컥한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내 가족을 만들어야지.
이렇게 다 함께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을 만들어야지
행복하다.
소중한 친구를 두어서
지금, 이 순간, 내가 터키에 있어서
데프네와 헤어지고 버스에 오르는 길,
짧은 2박 3일 동안 데프네 가족이 얼마나 편안했던지
버스정류장에 홀로 도착하고 나니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낀다.
가족으로부터의 외로움일까.
처음부터 없었다면 신경 쓰지 않을 공간이지만
있던 중에 사라지면 빈자리를 느끼듯이
내 안을 따뜻하게 자리 잡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빈자리가 느껴진다.
'얼마나 소중했던 2박 3일이었을까.'
빈자리의 외로움은 지난 시간에 대한 감사로 바뀐다.
이내 홀로 출발하는 새 여정 앞에서
동그랗게 뜬 달을 보며 소리쳐 인사한다.
"메르신 안녕! 고마웠어!"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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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