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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설렘의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튀르키예 괴레메에서 만난 라티파

by 여행가 데이지


"새벽이면 자는 거 아니야?"


"괜찮아. 도착하면 바로 와도 돼."



똑똑똑


새벽 5시.

태양도 방금 일어나 부스스 어스름을 낸다.

달콤한 잠을 깨워 미안한 마음을 굴뚝 가진 채

호스트 방문을 두드린다.



부스스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준 호스트 라피타.

그는 피곤함을 누르고 나를 반긴다.


우리는 짧게 인사만 한 뒤 바로 침대로 떨어진다.

카파도키아로 넘어오며 피로가 누적된 나도

살갗이 소파에 닿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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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마을의 풍경

"데이지, 오늘 카파도키아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

곧 퇴근하니까, 내 직장으로 올래?"


"좋아!

대중교통이 안 뜨는데, 직장까지 보통 어떻게 가?"


"히치하이크해서 와!"


어떻게 가냐는 물음을 하면서도

지하철이나 버스 대중교통이 없더라도 자전거 대여 같은 답변을 예상한다.

당당하게 '히치하이크'를 말하는 메시지를 보며 당황한다.


IMG_1651.jpg?type=w966 카파도키아 호스트 라티파와 함께/ 그는 블랙핑크 멤버와 닮았다.


보석 가게에서 일하는 호스트는 퇴근하는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온다.

본인을 라티파라고 소개하며 두툼한 입술과 커다란 입으로 미소 짓는다.

아침 잠결에 나눈 인사와 달리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며 그는 이야기를 꺼낸다.



라티파는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인도네시아 관광객을 상대로 보석 판매를 한다.

올해 30살인 그는 원래 2년 전, 유럽에서 일을 하려고 했지만,

비자 문제로 인해 잠시 터키에 머물러 있다.

그는 지금도 유럽 비자 신청을 꾸준히 하며 유럽에서 일하는 걸 계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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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Valley(사랑의 골짜기)는 동화 속에 온 느낌이다.




우린 라티파의 추천으로 Love Valley(사랑의 골짜기)로 향한다.


풍화작용으로 드러난 기암괴석은 동화 속에 있는 느낌을 준다.

난쟁이가 나올 것만 같은 동화 속의 한 장면.

그 동화 속에 내가 있다.


그저 가만히 역사적 작용을 견뎌내고

지나가는 바람에 쏟아지는 빗방울에

깎이고 깎인 다른 부분들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견고하게 그 자리를 지켰을 뿐인데

어느새 솟아오른 기암괴석들.

그들이 지켜낸 자기 모습은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수없이 솟은 기암괴석 앞에서 솟아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흔든다.


힘껏 몸을 흔들며 춤을 추다가도 가만히 앉아 물끄러미 사랑의 골짜기를 바라본다.

한참을 바라보며 기이하면서도 기이함이 주는 신비로움에 매료된다.

환상적 동화 속에서 라티파는 자신의 우주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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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간호사였던 라티파는 간호 일을 그만두고 여행사에서 3년 일을 했다.

여행사 일을 하면서도 여행을 꿈꿨고, 그는 결국 여행을 떠나는 삶을 시작한다.


"남들과 다른 삶을 선택한 순간이 지금을 만들었어.

부모님은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살길 원하셨어.

터키에서 오퍼가 왔을 때 동시에 발리에서도 오퍼를 받았는데,

나는 터키가 더 좋았어."



터키 지역인 이즈미르로 새로운 출발을 한 라티파의 일은 보모(nanny)였다.

일주일에 하루만 쉬는 날이 주어진 보모 일은 그에게 자유시간을 주지 않았다.

친구를 사귈 시간도,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없던 그는

카파도키아로 옮겨 보석 가게에 일을 구한다.


"투어 차량이 우수수 오게 되면 관광객을 대상으로 보석을 설명해.

관광객이 보석을 사면 그에 따라 월급을 받아.

관광객이 없는 날에는 일을 나가지 않지. 그래서 월급도 없어."


급등하고 급락하는 불안정한 터키 리라에서도 그는 불안정한 삶을 보낸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여행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이 삶이 난 좋아.

내가 후회하는 한 가지는

이 삶을 일찍 시작하지 않은 거야."



그의 우주를 듣고 있다 보니 해는 기암괴석 아래로 내려와 어둠이 찾아온다.

우린 괴레메 중심가 야경을 보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데이지! 여기서부터는 눈을 감아봐!"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눈을 감은 채 그의 손에 이끌려 전망대에 오른다.



"하나, 둘, 셋 하면 눈을 뜨는 거야."


"하나, 둘, 셋!"


그가 주는 깜짝 선물을 기대하며 눈을 뜨니

수많은 기암괴석과 마을이 밝히는 풍경이 드러난다.

노란색 전등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룬 괴레메 마을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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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온 듯하며, 동화 속에 온 듯한 기분에 감탄사를 남발하며 호들갑을 떤다.

편안한 행복과 황홀한 행복 사이로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나에게 라티파는 미소 짓는다.


"이것도 한 달 동안 보면 아무렇지 않게 되더라."


이제는 황홀한 야경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라티파는

슈퍼마켓에서 사 온 과자를 꺼내 자리를 잡는다.


"생각해 보면, 바다는 한 달 넘게 보아도 지겹지 않잖아.

기암괴석들, 이 돌덩이들이 질리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움직이지 않아서일까?


나도 오늘은 아름다운 야경에 온갖 반응을 보였지만,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 이 동화 속 풍경에 쉽게 질리겠지.


그래서

단풍이 들고,

꽃이 피고,

푸르른 잎으로 변하고,

흰 눈을 맞이하면서

강산이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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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레메 마을에 가득한 노란 불빛이 이룬 야경,

그런 불빛을 비추는 보름달 아래에서 우린 삶을 나눈다.


"바위도 풍화되고 침식하며 변화를 겪지만,

인간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가졌기에

인간인 우리에는 바위를 쉽게 질리는 걸까?"


"모든 건 타이밍인가 봐."


견고하고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기암괴석이지만,

언제나 머물러있는 게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연함을 가진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나는 말한다.


"오랫동안 보아도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물론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지금 카파도키아에서 처음 느낀 이 순간의 설렘을 온전히 누리고,

나중에 감흥을 잃게 되더라도, 첫 설렘의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라티파는 나의 말을 듣고는 이내 미소 짓는다.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도, 공유한 야경도,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20230802_062544.jpg?type=w966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과 해가 인사하고 있다.



견고하게 우뚝 솟은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은

내가 괴레메를 떠나는 날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괴레메 마을에 석양이 찾아오고,

조금씩 어두워진 거리 곳곳은 주황 등의 빛이 켜진다.



"사실 이곳에 머물게 된 이유는 남자 친구 때문이야."


기암괴석에 흥미를 잃은 그가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이유를 남몰래 궁금해하던 나는

놀라며 그를 바라본다.


"이즈미르에서 일할 때 카파도키아로 여행을 왔었어.


나도 너처럼 이곳을 여행자로 온 거지.

거기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남자의 제안으로 카파도키아로 넘어오게 되었어."


자신의 시간이 없던 이즈미르의 삶에서 라티파를 향한 제안은 새로운 변화였고,

그는 4개월 정도 남자 친구 집에서 살며 직장을 구하고, 집을 옮겨 지금까지 살아온다.


"그렇지만, 남자 친구는 처음과 달리 많이 변했어.

일 때문에 바쁘다며 어느 순간 나와 보내는 시간이 급격하게 줄었지.

그는 결혼에 대한 확신도 없고 나도 그와의 결혼에 확신이 없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눈에 방울이 맺힌다.

남모르게 쌓인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라티파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다 묻는다.


"라티파, 사랑하며 가장 중요한 게 뭐야?"


"소통(communication)이야.

사람들은 사랑을 함에 있어 언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 언어는 중요해.

말로 소통을 주고받아야지 서로 오해도 안 생기고 더 진한 사랑을 할 수 있잖아."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남자 친구와도 천천히 대화하는 라티파.

그마저도 조금씩 단절된 관계에서 그가 느껴온 감정을 떠올린다.


"라티파,

결혼도, 직장도, 지금 하는 연애도

모든 게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지만,


그렇기에 인생이 재밌는 거 같아.


우리 앞의 불확실함 덕분에

우린 우리만의 확실함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는 거잖아.

불확실한 인생에서 '나'를 잃지 않으면 되지.


가장 중요한 건 돈도, 남자 친구도, 직장도 아니고 '나' 자신이잖아.

그리고, 넌 지금 네 삶에 대해 만족하고 행복해하는걸."


찡해진 코를 툭툭 건드리는 라티파.

울렁거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석양이 이글거린다.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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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유는 여행하고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야.
그게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야.



괴레메 기암괴석은 우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다.

나는 알고 있다.

다음에 괴레메를 다시 찾아와도 이들은 묵묵히 이곳에 있을 거란 것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 속에서도

묵묵히 견고하게 본인을 지켜내는 기암괴석을 보며,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내 안의 나를 투영한다.

그건 비바람이 모질게 내려도 꿋꿋하게 서 있을 것이다.


괴레메의 야경은 언제나처럼 그대로 머무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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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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