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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I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5)

데이지 버킷리스트 ②⑦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5)

by 여행가 데이지 Feb 02. 2025

*본 글은 세계일주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입니다. 가볍게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지난 이야기 (1) 걸으면서 생각해 볼게 
                                              (2) 삶에서 쉼을 주어 만난 사람들
 
                                             (3)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고
                                              (4)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면, 그건 지루할 거야



여행은 사람 여행이다.

상대방의 삶을 알아가는 것,

그것이 여행이다. 


함께 그 순간을 공유할 사람들이 있는 것,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경험하는 것, 

함께 웃음을 나누고 슬픔을 공유하는 것. 

이것이 여행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행이 참 좋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순례길 13일 차: 컴포트존에서 나오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해

2023.10.22.  



6시 20분.

알베르게에 울려 퍼지는 행진곡에 눈을 떴다. 

이어서 나오는 한국노래에 부스럭부스럭 일어났다.

언니 오빠들이 미리 준비한 아침을 먹고 

우린 다함께 부르고스 대성당을 보기로 했다. 


11월 2일에 사리아(Sierra)로 찾아오는 친오빠와 만나기 위해

나는 순례길을 한 달 이내로 끝내야 했다. 

여유로운 언니 오빠들과 달리 나는 오늘 40km를 걸어야 했다.

결국 부르고스 대성당을 끝으로 

언니 오빠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순례길 초반부터 2주 동안 언니오빠들과 있으며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매일을 배부르게, 편안하게 지내왔구나. 

다시 홀로 순례길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굳건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비용도 아끼고, 스스로 길도 계획해 나가야지.   


실제로, 한국에서 돈을 벌고 순례길에 돈을 쓰려고 온 언니오빠들과 달리,

나는 1년간의 세계일주 중 순례길은 하나의 부분이었기에 돈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다. 


종종 저녁 메뉴를 고를 때나,

숙소를 정할 때 가격으로 눈치를 보는 순간이 많았다.  


언니 오빠들은 언제나 나를 배려했지만,

언제까지 계속 나에게만 맞출 수 없다.  


'그래, 어쩌면 이즈음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스스로 헤어지는 이유를 찾아내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덜었다.  


'그레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동시에 덜어지지 않는 아쉬움에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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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3대 성당인 부르고스 대성당.  

알베르게 퇴실이 8시임에도 

대성당은 9시 30분 즈음 개장이기에

대성당 밖 분수 주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눴다.  


성당이 개장된 이후

미사를 하고 있는 예배당을 포함해 

성당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며 우린 시시콜콜 이야기 나눴다. 

성당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고, 볼거리가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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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유럽 성당을 둘러보면

마치 힌두교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예수 모습은 언제나 성인 백인의 남자일까? 

왜 언제나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있을까?  


대성당의 견고하고 엄숙한 전시물을 보며 여러 가지 질문에 빠진다. 

수천 년 전에 건설되어 그래도 보존되어 온 종교 건축물의 힘은 언제나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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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부르고스 대성당은 순례자와 학생은 할인되어 5유로이다.



성당을 둘러보고 나니 시곗바늘은 11시를 가리켰다.  


"부르고스가 참 아름답다. 

예진아, 만나게 되어서 정말 좋았어." 


이동할 준비를 하다가 11시 30분이 되어 종소리가 요란하게 부르고스에 울렸다. 

종소리를 들으니 언니 오빠들과 헤어지는 순간이란 것을 깨달았다.  


"여기는 종이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치나 봐(웃음)" 


괜히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종소리를 탓하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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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시작된 혼자만의 길


"예진아, 건강하고, 항상 조심해야 돼.

부엔까미노!"  



"우리, 다음 여행에서 또 보자. 

까미노 가는 길에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몰라!

그러니, 부엔까미노!" 



헤어지기 전 다 같이 남긴 추억헤어지기 전 다 같이 남긴 추억


광장에서 준비하는 언니 오빠들과 인사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인사하면 정말 헤어질 것만 같아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식으로 얼버부리며 헤어졌다.   


그렇게 다시, 길 위에서 혼자가 되었다.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은

나도 모르게 생겼던 컴포트존에서 스스로 나오는 느낌이었다.  

컴포트 존은 언제나 편안하고 좋지만, 

나오는 데에는 큰 용기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혼자가 되어 순례길을 걸을 것이며,

맛있던 닭 한 마리 칼국수는 이제 먹지 못하고,

매일 함께 준비한 샌드위치는 없다. 

함께 이야기 나누며 설어온 순례길도,

서로의 인생과 삶에 대해서 진솔하게 나누던 순간도 없다. 


조금 울컥했다. 


언니 오빠들과 함께한 지난 순간들언니 오빠들과 함께한 지난 순간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순례길 외에도 나만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언니 오빠들 품에서 언제까지 편하게 즐길 수만은 없다는 것을

지금껏 즐겼던 아름다운 순간을 만족하고

다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예진아, 다시, 너만의 길을 만들어가야지.'


마음을 다 잡고 

조금씩 조금씩 발을 내딛었다. 



목표한 알베르게까지 36km를 하는 상황에서 

7시간을 연속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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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와 끈기의 시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질릴 때까지 계속 걸었다. 

한 순간은 계속해 걸어도 여전히 가야 하는 긴 길을 보고

힘이 풀린 채 잠시 쉬었다.  


이후, 다시 걷기 시작하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6

목적지 이전 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이 되었다. 


'피곤하다.' 


조금씩 몸에 무리가 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5.6km 만 남았으니까 힘내보자!' 


잠시 의자에 앉아 5분 정도 쉬고, 

마지막으로 다시 힘차게 걸었다.  


목표치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풍경 하나 보지 않고 

오로지 노래에 집중하며 앞만 보고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저 멀리, 도로변 한가운데에 홀로 서있는 

오늘 알베르게 성당이 시야에 보였다.  


장정 7시간을 걸었구나. 

신예진, 장하다. 


문득 울컥함이 든 채로

저녁 7시가 되어 녹초로 알베르게에 들어섰다.    


알베르게 봉사자와 단 둘이서 보낸 밤.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저녁식사를 했다.알베르게 봉사자와 단 둘이서 보낸 밤.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저녁식사를 했다.



어느덧 해가 졌는지 방안이 깜깜해졌다. 

전기가 없던 알베르게의 순례자는 오로지 나 뿐이었다.


차창 너머로 바람소리가 세차게 들려와

밤에 춥지 않기 위해

다른 침대에 놓인 담요를 몽땅 가져왔다. 


두꺼운 이불로 탄생한 담요를 덮고 

고요하고 껌껌한 알베르게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를 돌아봤다. 



언니 오빠들과 헤어진 채

장정 40km를 혼자서 걸으며

홀로 알베르게를 쓰고 있구나. 


매일 자기 전까지 장난치며 

서로에게 잘자라고 하는 이가 없이

고요한 적막만이 나와 함께하는구나. 


진정으로 컴포트존에서 나와

다시 새로운 순례길이 시작되었구나.  


산티아고까지는 450km 정도 남았다.      


13일 차의 밤을 보내며, 예진아 장하다.13일 차의 밤을 보내며, 예진아 장하다.



순례길 14일 차 : 사랑만이 유일하게 바꿀 수 있어

2023.10.23 



무슨 일이지?



매우 따뜻하게 일어났다. 


아무런 히터도 없는 방이었는데, 

순례길에서 잔 날 중에 가장 따듯하게 잠들었다. 


어제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자서 그럴까,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럴까, 

조금만 더 힘내서 걸어가 보라고 위로해주셔서 그럴까. 


어젯밤, 자기전 봉사자가 끓여준 따뜻한 물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오늘은 따뜻하게 잠들어 아무탈없이 내일도 걷게 해주세요. 

내일도 다시 걸을 힘을 제게 주세요. 

오늘 밤을, 따뜻하게 보내게 해주세요. 


실제로, 그 날밤은 

순례길을 하며 보낸 가장 따뜻한 밤이었다. 



아침을 먹으며 봉사자 친구는 인도에 갔던 이야기를 공유했다. 

"나는 순례길을 7번 정도 했는데,

한 번은 지금 이 곳에서 구루를 만났었어.

구루는 나한테 말했지.


'네가 쉬고 싶을 때까지 쉬어라.'


나는 3일 밤을 이곳에서 보내고 

이제는 가야겠다는 느낌을 받았어. 

나는 구루에게 이제 가고 싶다고 말했어.


'그래, 지금이 바로 갈 때이다.'라고 구루는 말했지."


그이의 이야기를 끝으로 오늘 길을 출발했다. 

전기가 없어 폰을 충전하지 못했다.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이 길로 가는 게 맞나?' 


가다가 다시 뒤돌아서 돌아가는데, 

저멀리 반대편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9


갈림길에 서서 길을 확신하지 못할 때

마침 한 순례자가 지나친다. 


"제가 지금 배터리가 없어서 지도 확인을 못하는데,

혹시 이쪽으로 가는 게 맞나요?" 

"네. 당신은 맞게 가고 있어요." 


내가 맞게 가고 있다는 길을

방금 전 확신이 없어 돌아온 길이었다. 


똑같은 표지판과 똑같은 길이지만,

다른 순례자가 맞다는 말 하나로

불확실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 된 것이다. 


"지금 당신의 길이 맞아요" 


주위의 확신이 가져다주는 게 

이렇게나 길에 큰 힘을 주다니. 

그는 매우 에너제틱하게 웃으면서 힘을 실어주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0

나에게 확신을 준 이는 네덜란드에서 온 비였다. 

비는 프랑스에서부터 순례길을 시작해 80일째이다.


"조금씩 내 집이 그리워지고 있어"


보조충전기를 갖고있던 비는 폰 충전을 도와주었다. 

우린 그 길로 함께 점심을 먹으며 오늘 하루 걸음을 함께했다. 



비는 생명과학 학위로 석사 졸업을 마치고, 

일을 구하기전에 순례길을 시작했다. 


"우와! 나는 불과 시작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오다니! 여정은 어땠어?"


그는 프랑스에서 캠핑을 하던 이야기,

벨기에에서 만난 사람들, 등 이야기를 공유했다. 


"순례길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어디에 갈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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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14일차



우린 보폭을 맞춰 서로의 우주를 공유하기도,

서로 다른 보폭으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앞에서 걷던 중국 분과 이야기 나누게 되었다. 


중국사람이지만, 여기저기 여행을 하는 중이다중국사람이지만, 여기저기 여행을 하는 중이다

"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미국으로 대학원을 함께 나왔어.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며 살아왔지.


그러다가 

그냥 뛰쳐나왔어.

나만의 회사를 열고 싶더라고.


결혼도 너무 성급했던 거 같아."



미국 보스턴에서 인지과학 박사를 받고 실리콘벨리에서 일했지만,

회사를 나온 그는 홀로 세계여행을 택했다. 


"실리콘벨리의 삶은 매우 지루해. 

나도 인지과학 관련해 큰 회사에 있는게

물론 큰 봉급이자 매우 좋은 직장이지만, 

매우 지루해.


실리콘벨리는 다양하지 않아.

모두들 자기 주식과 봉급만 이야기 하고있어.


오히려 보스턴에서 공부했을때가 더 다양성이 많다고 느꼈어. 

실리콘벨리가 좋을 수 있지만, 나한테는 지루하다고 느꼈어."



태어난 중국에도, 일했던 미국에도 자기 집은 없으며

세계 전부가 자신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인의 극적인 인생을 아무렇지 않게 전했다. 


"그럼, 이혼을 한 거야?"


"아니, 계속 결혼한 상태야. 

그렇지만,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 만나는 걸 이해해 주기로 했어."


"결혼한 남편이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이해해준다고?"


대학생 새내기때 남편과 만나 함께 인지과학으로 졸업하고, 

석사도 미국으로 함께 넘어갔다. 

24살에 결혼을 하여 미국생활도 함께 해왔지만,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그에게는 새

로운 만남을 원하는 욕구가 있었다. 


결국, 그는 남편에게 오픈 관계를 요구했고, 

이미 이혼까지 다 간 상태에서 법적으로 이혼만 하지 않은채 오픈 관계로 지내고 있었다. 



그가 툭툭 던지는 말속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발견하고,

색다른 시각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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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 온 부녀와 프랑스에서 온 청년과 함께


전 세계 각지에서의 삶을 듣다 보니

도착한 기부제 알베르게.


프랑스 남자와 자전거로 여행하는 체코 부녀와 그날의 온기를 함께했다. 

우린 와인 한 병을 가운데로 둘러앉아 이야기 나눴다.


프랑스 친구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입을 열었다. 


"나도 너처럼 젊을 때 여행하곤 했지."


10년 전에 지금의 나처럼 세계여행을 했던 프랑스 친구는

다시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몇 달 전까지도 계속 여행을 했는데, 

무언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왜?" 


"나도 몰라. 

그냥 무언가 느낌을 받았어.

누군가 말했지. 

우리 인간은 모국(Motherland)에 어떻게든 다시 찾게 된다고. 

그렇지만, 자신의 땅을 바꿀 유일한 것, 그 인간적 본능을 뛰어넘게 만드는 유일한 요인이 있지." 


"뭔데?"


"그건 사랑이야"

Big love. 


네가 그 사랑이 없다면, 

너는 어디든지 갈 수 있겠지만, 

너는 분명히 돌아올 거야."


순례길의 표지판순례길의 표지판

"지금 나는 다시 세계여행을 하고 있잖아. 


그런데 무언가 무언가 나를 다시 본국으로 이끌어.

심지어 내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더라도, 

무언가 나를 다시 프랑스로 , 고향으로 이끌어."


그의 말은 흥미로웠다. 

인간이 내재한 본능인 걸까.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늙어서도 여행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어. 


내 생각으로 그들이 나이 들어서도 정처 없이 여행하는 이유는 

그들이 젊을 때 그걸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 같아."


"때때로 그들은 그러고 싶지만, 에너지가 없기도 하지."


내 말을 끝으로 거드는 체코 아버지에게 

프랑스 친구는 말했다. 


"그렇지. 그러나, 네가 할 수 있다면,

너는 당연히 시도해야 해. 

너의 열정을 발견해야 해."


그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는 삶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야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 말이야.


그걸 발견하는 건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그걸 살아내는 거야."


기부제 알베르게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낀 따뜻함은 

알베르게를 떠나는 순간까지 온기가 남아있다.

다락방 같은 조그만 공간에 옹기종기 모인 순례자들.

각자가 가져온 와인과 초콜릿을 나눠먹으며 삶의 이야기하는 이 순간.


우리는 삶이라는 순례길 위에서

삶을 이야기했고,

내일의 삶을 위해 서로에게 말했다. 


"부엔까미노"



 


순례길 15일 차: 걷다가 힘들어 울더라도 도착해서 울어야지

2023.10.24.  


까미노 와인 만남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 4시 30분에 일어났다.  


"내일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하네" 


어젯밤, 체코 부녀는 비 소식을 전했다. 


창문 너머 아직 비는 오지 않았다.  


'비 오기 전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해보자.' 


아침을 준비하고 나니 어느덧 7시가 되었다. 

눈치 없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 앞에서 

여전히 밖은 껌껌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28

차량에서 뿜어 나오는 동그란 빨간 점이 보인다. 

껌껌한 밤거리를 밝히는 유일한 불빛은

가까워오다가 다시 멀어지며 도로를 질주한다.  

검은색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든다.  


순례길은,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은,

마치 정말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   


헤드셋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일출을 맞이했다. 


노래의 웅장함과 이른 아침 순례길이 참으로 어우러져서

걷던 중에 문득 울컥함에 사무쳤다.   



홀로 걷기 시작하니 

무언가 간절해졌다. 

그저 고독과 함께 걷고 있노라면

신을 찾게 되었다. 


해가 뜨게 해달라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완주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게 되면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건가? 

나이가 들며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고 

점점 홀로 삶을 마무리하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필요한걸까?  


고독이 가져오는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진다. 

엉뚱한 대답으로 답을 찾아가다보니

조금씩 날이 밝아온다.  


비가 올 예보를 뒷받침하듯,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해가 뜨게 해 주세요.' 


계속 어둡기만 하고, 

곧 비가 올 것만 같던 날씨의 연속.

졸지에 폭우처럼 비가 쏟아졌다.


하늘을 향해 소원을 빌고

노래를 듣고,

노래도 불렀다.  


나의 바람을 들어주었는지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이 조금씩 밝아왔다.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은 내게 말하는 듯했다.  


'언제나 너를 응원해' 



조금씩 해가 뜨기 시작했다조금씩 해가 뜨기 시작했다


구름을 비집고 찾아온 햇빛과

문득 흘러나오는 아리랑 선율의 감동이 뭉쳐지니

갑작스레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위에

오로지 혼자 있다는 용기 아래에서

누구보다 크게 울었다.  


그리고 계속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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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홀로 걷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혼자서 걷기 시작하니, 

빈틈을 비집고 여러 생각이 든다.


생각의 대부분은 과거를 곱씹는 일이었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과거에 있던 일들이 연결되어 생각나고 

과거는 다른 과거를 불러일으킨다. 

걸으면서 여러 과거들이 생각난다. 


이렇게 과거를 곱씹고 되새기며 

돌이킬 때마다 나는 과거를 조금씩 씻어 내리고 있다.  


고향에서 보낸 유년시절,

대학에서 보낸 청춘시절,

추억 속에 보관해 둔 시절들이

저절로 나를 찾아왔다.  


지난 여행의 순간들까지.

세계일주 230일이 되면서

여행을 통해 배운 수많은 교훈을 떠올렸다.

  

온전히 여행만 하며 살아가는 삶,

훗날 어떤 형태이든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순간,

그저 반사적으로 찾아오는 기억들을 지나

현재 순간에 도달한다.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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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폭풍우처럼 내리다가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조금 쉬었다 갈까'   


불규칙적으로 내리는 비와

끝없이 홀로 걷는 길 위에서

끝없는 과거를 맞이하고

수없는 생각을 고민하며

순례길을 걸었다. 


잠시 버스정류장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유난히 오늘따라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 힘이 든다.  



중간에 잠시 쉬어도

세차게 부는 바람을 막느라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가까워 오늘 건물들에 

홀로 걷던 무수한 고뇌와 고독의 엉겁들이 눈물을 터뜨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사히 도착한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 순례자분들과무사히 도착한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 순례자분들과

묵묵히 걷는 과정이지만,

그 묵묵히 나아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비와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길 위를

뚫고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강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실제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온 지난날들은

조금씩 보이는 목적지에 의해 위로받는다.   



염증이 부풀어 오른발은

홀로 걷기 시작하면 3일 연속 35km 이상을 걸은 흔적을 보였다.  


'고생했어 내 발'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후 6시임에도

모든 피곤을 껴안은 몸은 녹초가 되어 바로 잠들었다.  


결국 다 걸어왔다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포근한 이불이 되었다.  





순례길 16일 차 :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거야

2023.10.25.   



알람소리에 눈을 뜨니 아침 7시. 


'순례길 시작하고 처음으로 땀을 뺐네' 


이불 2개와 목을 감싸는 두건으로 

12시간 동안 잠자며 땀을 쭉 빼고 나니 

몸은 괜스레 개운해졌다. 


'내 몸이 많이 힘들었구나.' 


어제 꽤나 힘든 하루였지만,

내 몸이 그렇게나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  


푹 잠들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6


예전에 마트에서 산 초콜릿과 오일, 빵을 이용해 아침을 먹으니

아침 8시에 맞춰 해는 조금씩 뜨고 있었다.    


오늘은 30km 만 가는 날이라 어제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어김없이 노래를 들으며 출발했다. 


확실히 오늘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없어서 별들이 조금 잘 보였다.  

그렇게 지도를 확인하며 걷는데,

순례자 지도와 내가 점점 멀어졌다.  


'왜지?' 


길에 그려진 순례길 표시를 분명히 보고 있지만

완전히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잘못하고 해바라기 밭 안으로 들어왔다잘못하고 해바라기 밭 안으로 들어왔다

해바라기로 가로막힌 원래 길을 가기 위해 

고군분투로 빠져나오니 

저 멀리 걷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제가 길을 잃었는데 무사히 찾았어요!" 


길을 잃어 한동안 방황하다가

올바른 길을 찾고 나니

괜스레 반가움에 

순례자에게 달려가 무턱대고 말한 것이다. 

 

"축하해요!!" 


순례자는 대뜸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와 말을 건네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축하해 주었다.  


"감사해요.

부엔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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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km를 한 번에 걷고 또 걷다 보니,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한쪽이 아플 때 다른 쪽은 아프지 않다가

다른 쪽이 아플 때 또 다른 쪽은 잠잠했다.  

연속해서 30km 이상 되는 거리를 계속 걷다 보니

몸 안에 무언가 이상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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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조금 천천히 걸어가도 돼.' 

나는 나 자신에게 되뇌었다.


'속도가 중요하지 않아.

천천히 걸어도,

끝까지 완주하도록,

천천히, 천천히.'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다짐했다.   

동시에 어제 프랑스 청년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순레길은 삶과도 같아.

많은 이들은 매 순간을 투쟁하면서 살아가지만,

거기서 무엇을 얻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중요한 건 그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 거야. 

순례길도,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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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고 또 걷고 걷다가, 

목표 전 마을(Sahagun)까지 도착했다.  

매번 바게트에 초콜릿을 끼워 간단히 먹었지만,

무언가 요구르트를 먹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어제저녁도 안 먹고, 아침도 대충 먹었기에

점심 먹을 생각에 잔뜩 들뜬 채로

요구르트를 시원하게 한 입 마시는 순간,


천국을 경험했다.  


요거트와 빵은 제 천국을 책임질 수 있어요요거트와 빵은 제 천국을 책임질 수 있어요


대놓고 계산대 옆 바닥에 앉아 

점심으로 배를 마구마구 채웠다.  


'순례자가 피곤해하고 있군요' 


손님들은 지나가며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사람들의 친절과 점심으로 배를 채우니 다시 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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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도 계속 나아가보는거야

10km 남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고 

걷고

또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샤워기를 틀기 전,

추위로 인해 찬물이 나오지는 않을까 

가슴이 떨렸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샤워기를 트니

따뜻한 물이 나왔다.  


따뜻한 물이 좋아서,

짜릿할 정도 행복하게 샤워했다.  


'감사합니다' 


매번 당연하게 씻었던 따뜻한 샤워조차도

감사하는 태도를 순례길은 알려주었다.   


소중한 밤을 보내기 전,

사랑하는 엄마에게 편지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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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엽서와 함께
<dear. 사랑하는 우리 엄마, 임희경 씨에게.>
엄마~~
지금은 2023년 10월 25일 저녁 6시.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 berciano del real camoni라는 곳에 있어.
어제는 36km를 걸었고, 오늘은 30km를 걸었어.
걷다 보니 문득 생일 축하 영상이 생각나서 다시 봤어.  그러자 눈물이 저절로 왈칵 흐르더라.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엄마를 정말 사랑해서,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눈물이 흘렀어.

신예진은 임희경 씨를 무척이나 사랑한답니다 ~~(하트) (하트) (하트)
어느덧 여행을 시작한 지, 일본으로 가는 공항에서 전화기 너머로 눈물을 엄마가 흘린 지,
250일이 다 되어가고 있어. 

나는 매 순간 배우고 성장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어. 참, 행복해.
여행이전보다 조금씩 생각이 확장되고 점점 더 스스로가 발전됨을 느끼면서,
앞으로도 더 성장하는 사람이, 더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엄마에게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할게.
앞으로도 더 크게 생각하고, 꿈꾸고, 노래하는 사람이 될게. 
그러면서도 소중함을, 작은 소중함도 잊지 않는 사람이 될게. 
임희경 씨를 항상 응원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25/10/23 –산티아고 순례길 16일 차 중 스페인의 조그만 마을에서 막내딸, 신예진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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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며, 캐나다 영어 교사와 스페인에서 공부하는 학생과 함께

한참 편지를 쓰고 나니,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무료 저녁을 먹었다.  


샐러드와 오일에 빵을 찍어먹는 것도,  

이후에 따듯한 국물에 닭고기를 먹는 것도, 

그 이후의 달콤한 멜론과, 요구르트까지도

모든 게 완벽했다.  


모든 게 감사했다.

지금 이 순간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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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이후에는

양초를 들고 순례길 소담을 나눴다.  

 저마다 자신에게 순례길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순례길을 시작했는지 이야기 나눴다.  

이야기 중에 일부는 눈물을 흘렸다.  

'저에게 순례길은...' 


나도 모르게 꾹꾹 참아온 힘들었던 감정들이 나왔다.  


순례길을 내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홀로 걷는 게 얼마나 고독한지,

지나간 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비를 맞으며 걷던 중 해가 뜨면 얼마나 행복한지,

이 길이 쉽지만은 않은 길이란 것을,

소리 내어 엉엉 울었던 지난 내 감정은 무엇인지를.


다함께 들고 있는 촛불의 온기는 

따뜻하게 내 감정을 위로해주었다. 


각자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기에 

그 길위에서 스스로에게, 

스스로의 길을 함께하고 있는 

동행자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각자의 길 위에서 

스스로 걸어가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함께 걷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에서 온 다른 순례자는 말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한국에 있는 소중한 존재들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어요.

제가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 약한 존재일 뿐이란 걸 다시 깨닫게 해 줬어요."


그의 말에 대한 공감은

더 큰 울컥함을 가져왔다. 


홀로 어둠 속을 뚫고 순례길을 걸으며홀로 어둠 속을 뚫고 순례길을 걸으며

그렇다.

나는 순례길을 통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촛불을 들고 둘러싼 사람들은 하나둘씩 코를 훌쩍였다. 

일부 볼에 생긴 눈물자국을 보며 나도 훌쩍였다. 

각자 저마다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여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각 순례자들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었다. 


우린 모두 

순례길을 통해

우리의 나약함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감사함을 얻었다. 



말하지 않아도 나눠지는 그 감정은

밤동안 나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우린 저마다 촛불을 내려놓고 서로를 껴안았다. 

한 분은 나를 지긋이 있는 힘껏 안아주셨다. 


그 포옹을 받자마자 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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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일부로 모른척해왔던 고통들이

진한 포옹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정말,

따뜻한 포옹이었다.


그 포옹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순례길이

종종 외롭기도,

아프기도,

슬프기도 하지만,

순례길은 삶과 같다고,

삶에는 여전히 따뜻한 위로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많이 힘들었지?"

"오늘도 잘 걸어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부엔까미노!'를 외치며 인사하는 우리가 있기에,

폭풍우 속에서도 해는 떠오르고,

하루를 마치고 따뜻하게 위로하는 포옹이 있기에.

나는 감사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 스페인 I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6)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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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the_daisy_path : 인스타그램

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나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블로그와 유튜브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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