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버킷리스트 ②⑦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본 글은 세계일주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입니다. 가볍게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지난 이야기 (1) 걸으면서 생각해 볼게
(2) 삶에서 쉼을 주어 만난 사람들
(3)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고
(4)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면, 그건 지루할 거야
(5) 나만의 속도로 걷는 거야
2023.10.26.
꽤나 춥지 않은 밤이었다.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뜨니 6시.
오늘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전
후딱 움직이자는 생각으로 아침을 빠르게 먹었다.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무료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부부는 내 신발을 바라봤다.
"그 신발이면 오늘 홀딱 젖을 거예요"
오늘 어디까지 갈까 고민을 하던 중,
다음 마을이 기부제 알베르게인 걸 발견했다.
나아가 헤어졌던 동행 분들도 오늘 다음 마을까지 간다는 정보를 받았다.
'오늘 7km만 걷고 다음날 레온(Leon) 마을에 가나,
오늘 더 걷고 다음날 레온(Leon)에 가나 똑같잖아!'
생각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오늘은 7km만 걷기로 다짐하며
밖으로 나섰다.
비가 조금씩 내리면서 여전히 어두운 아침이었다.
해가 그리웠다.
순례길을 시작하던 그즈음의 맑았던 날씨들이 생각났다.
비가 세차게 내리니 점점 신발이 젖는 게 느껴졌다.
중간 다리에서 멈춰 고민했다.
'다음 마을까지 어느덧 2km 남았는데, 더 갈까 멈출까'
일단 더 가되, 카페에서 멈춰 잠시 고민해 보자.
결국, 마을에 입장했다.
이미 홀딱 젖은 생쥐꼴로.
신발은 완전히 다 젖었다.
창문 너머로 비는 세차게 내리고
나중에는 더 심하게 내릴 예정이라는데,
나에게는 세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나중에 더 심하게 내리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아예 이곳에서 쉬기
비가 다 갠다는 오후 5시 이후에 가기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고민하는데
이전에 동행했던 언니 오빠들이 카페에 들어왔다.
헐!
우린 그렇게 다시 모이게 되었다.
다들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호스텔을 확인하는 중에,
뒤따라오던 동행 언니 오빠들도 만났다.
"와!!~~~ 다들 오랜만이야!!~~~"
함께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한 채
둥기둥기 포옹하며 인사 나눴다.
함께 호스텔에 짐을 둔 뒤,
우린 여느 때처럼 함께 슈퍼에 가고,
점심을 먹으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알베르게에 있던 기타로 이야기 나누고,
돗자리를 챙겨 함께 피크닉을 나갔다.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배경으로 순간을 담았다.
"예진아, 아까 네가 나를 안아주었을 때,
사실 울컥했어."
다현 언니는 재회 포옹을 나눌 때 감정을 공유했다.
힘겹게 하루 순례길을 마치고 마을에 도착했을 언니.
힘들거나,
알게 모르게 지칠 때,
누군가 나를 꼭 껴안아주면 울컥한 마음이 든다.
언니도,
나도,
그 느낌을 알고 있다.
"언니의 울컥함을 정말 공감해."
언제나 무언가를 쫓아가려고만 하고,
달성하려고만 해 왔던 날들이,
그저 가만히 멍 때리고
눈을 감고
명상을 하던 날들을 지워왔다.
오랜만에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
창 밖으로 새소리가 들려온다.
우린 기타 하나를 갖고
그저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옹기종기 작은 책상에 모여
다현언니, 민성언니가 제작한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함께 다음 목적지를 이야기하던 중,
내일 레온으로 다 함께 가게 되었다.
"얏호!"
내일 날씨도 무사히 해가 뜨고 좋은 날이기를 빌었다.
무사히 다 함께 레온에 도착하기를.
순례길을 걸으며
알게 모르게 순례길도
무언가 해야 할 일로 여겨왔다.
과거부터 무언가 성과를 계속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순례길에서도 알게 모르게 느낌으로
적어도 20km 이상을 걸어야지 하루 순례길이 완벽해진 느낌이었다.
<언니 오빠들과 다시 만나고는
내 할 일을 다 잊어버리고
계속 함께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참, 이 사람들을 내가 좋아하는구나!
함께하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고, 행복하다>
하루 7km를 걸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씨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언니 오빠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예측불가한 계획 속에서 생기는 행복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바라본 파란 하늘처럼
소다 같은 달콤함이었다.
이후 레온 대성당 앞에서 헤어지면서
눈물이 나도 모르게 왈칵 났다.
나도 모르게 정들어버린, 인연이 닿아 참 감사한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서 다시 한번 혼자만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다시 만나리~라며 노래를 불렀다.
"그만!! 그만!!!"
다현언니가 외쳤다.
노래를 같이 부르다, 울컥함을 멈출 수 없어서였다.
나도 괜히 울컥했다.
노래를 부르다 실제로 감정이 북받쳐 울컥하게 되는 그 순간.
우린 다시 또 만나기를 기약하며 서로의 순례길을 응원했다.
2025.10.28
언니 오빠들과 다시 헤어지고 난 뒤,
조금씩 다시 혼자서 걷는 게 익숙해졌다.
홀로 순례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생각들이 내 무의식을 침범한다.
그중에서도,
정말 생각나지도 않았던 옛날 노래들이 마구마구 순례길에서는 생각난다.
나의 내면에, 나의 과거에 나도 모르게 계속 들어가지고 있나 보다.
과거 아픈 추억이 담겨있어 듣지 못했던 노래도 듣고 싶어졌다.
들으면서 눈물이 날걸 알면서도 듣는다.
그런데, 더 이상 이전처럼 가슴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과거들도 곰곰이 떠올리고, 과거를 마주하는 법을 배운다.
걸으면서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펑펑 울기도 하고,
정말 생각나지도 않았던 옛날 노래들이 마구마구 순례길에서는 생각난다.
나의 내면에, 나의 과거에 나도 모르게 계속 들어가지고 있나 보다.
2023.10.29.
홀로 폭풍같이 순례길을 걷다가,
마침내야 오늘 50km를 걸었다.
50km를 걷고 난 뒤,
알베르게에 들리며 전진 속도를 낮추니
곧바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리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각종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몸이 노곤노곤하고,
발과 다리에 있는 모든 독소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이 느낌, 매우 좋다.
잠깐만 눈을 붙여도 온전히 잠에 빨려 들어간다.
피곤함이 쌓여서 그렇다.
잠깐 눈을 붙여도 바로 잠에 빠져드는 피곤함.
오늘은 하루종일 걸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내일 16킬로만 걷게 될 거 같은데,
몸에게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칭찬하고 조금 쉬게 해야겠다.
로미스타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와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우린 길 위에서 잠시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했다.
일련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며
우린 인연의 장난을 즐겼다.
준비 후 7시 30분 즈음 출발!
아침의 여명은 조금씩 밝아져오고 있었지만,
아주 조금 어스름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어제 레온에서 언니 오빠들과 헤어진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아쉬움과 함께 들었던 알 수 없는 울컥함,
다시금 홀로 나아가는 순례길을 바라보며 지난 감정을 돌이켰다.
걷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현재를 살고 있다고 느낄 때,
이 순간을 감각으로 온전히 느낀다.
느낌은 이내 울컥함으로 바뀐다.
내가 지금을 살고 있구나.
비가 주야장천 내리다 해가 뜨는 순례길의 연속에서
나는 걸으면서 생각한다.
참 감사하다.
지금 이 순간.
2023.10.31.
하루 걷기를 마치고 알베르게에 돌아오면
모든 일들 제치고 그냥 잠들고 싶어진다.
어느덧 씻는 것도 귀찮아졌다.
순례길 이후의 세계일주 계획을 세우다가
SNS로 도망갔다.
잠깐 보는데도 혼이 빠져나와서 잠시 멍을 때렸다.
창문 너머로 해가 떠 아름다운 풍경을 보였다.
'내일 오세브레이를 넘어가면
가스티이야는 끝이고,
가 딸리냐라는 곳이 나오는구나...'
순례길의 계획을 잠시 살펴봤다.
동시에, 창문 너머로 평화롭기 짝이 없는
스페인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멍 때렸다.
순례길의 끝이 보인다는 게 좋다.
하루하루 목표를 달성해 성취감은 있지만,
동시에 다음 여행 계획에 대한 스트레스와
추위로부터 많은 곤욕을 치르는 순간들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지금 떠올라있는 이 햇살이 감사하다.
책상 아래에 있는 난로에 감사하고,
순례자를 반기는 알베르게가 있음에 감사하다.
오늘 밤은 꽤나 춥게 잤다.
얼마나 몸을 웅크리고 잤는지,
한쪽 팔에 쥐가 심하게 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살아있을 정도이다.
새벽에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코코아와 있는 재료들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새벽 3시, 연락을 확인하고 여행 계획을 세웠다.
친오빠와 순례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오빠는 내일 출국을 앞두고 있다.
오빠와의 만남에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온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오빠와 여행한 게 언제더라,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겠구나.'
여행 계획을 세우다 5시 즈음 잠들어 7시에 일어났다.
아침으로 스파게티를 다시 만들어 먹고 오늘 길에 올랐다.
오늘은 20km 만 걷는날이어서 오히려 천천히 걸었다.
적게 걷는 날에는 마음이 풀어져서일까
더 걷기가 힘든 느낌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히려 더욱 여유를 즐기고,
이것저것 풍경들을 보면서 걸었다.
특히나 오늘은, 하늘이 매우 맑고 비도 안 와서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완연하게 가을로 물든 거리거리를 걸으면서,
아름답게 물든 가을의 거리를 즐겼다.
한 여성분께서는 나를 보면서 씩씩하다며 지나가는 칭찬을 해주신다.
또 눈이 마주친 순례자분들과도 올라!라고 인사한다.
걷다가 보이는 꽃으로 예쁘게 꾸며놓은 집 앞에서 사진도 한 컷 찍고,
지나가다 펼쳐지는 하늘을 괜히 올려다보니 감탄사를 계속 말하기도 한다.
참 아름답다.
동시에 너무 오랜만에 놓인 오후의 여유 앞에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매우 감사하다.
어느덧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면서 ,
그리고 혼자서 걸으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 왔음을,
심심하더라도, 혼자서 있는 시간을 충분히 보내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밀렸던 일들을 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잘 걸어왔다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가만히 멍 때릴 수 있는,
오랜만에 그저 이것저것 영상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슈퍼마켓 디아에 들려 점심을 먹고,
4km 정도를 더 걸어 오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오래된 알베르게는
걷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온전히 들려온다.
삐걱삐걱
삐걱거리는 소리에 맞춰 계획을 세웠다.
내일은, 비가 온다.
그리고, 나는 40km를 걸어야 한다.
언제나, 목표지점을 정해 매번 그곳을 향해 가는 나의 순례길.
무언가를 향해 매번 끊임없이 달려온 내 삶과도 같다.
목표한 만큼 우선 빨리 걷고 그곳에 와서 푹 쉬는 것으로부터의 행복도 있지만,
중간중간 천천히 걷고 풍경을 음미하는 기쁨도 있다.
그렇지만, 늘어지게 되면 오랫동안 걸어 풀어지는 느낌은 싫다.
순례길을 통해 나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많이 깨달았다.
한동안 하지 않았던 기도도 시작했다.
부디, 무사히 마칠 수 있음에,
하루하루 해낼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고, 비가 그쳐 해가 뜰 때 눈물이 흐른다.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지금 이 여유도,
지금 이 평화도.
그리고, 그동안 내가 보고 싶었던 것들,
듣고 싶었던 것들도 마음껏 듣고 본다.
그렇게, 여유롭게 도착하여 씻고 오랜만에 명상도 하다가,
4시 30분 즈음, 잠시 잠에 들어 다음날까지 잠들었다.
계속 알베르게에서 춥게 쪼그리면서 자다가
오랜만에 집같이 편안한 침대에서 이불 덮고 잠드니,
이렇게나 편안하고 행복하게 잠들 수가.
깊은 잠에 빠진다.
2023.11.01.
어제 오후 4시 30분에 잠들었는데, 눈뜨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방에서 잠에 드니 몸의 피로가 풀렸는지 15시간을 잠 에빠였다.
알베르게 봉사자 수잔은 나에게 말했다.
"가끔씩 그렇게 푹 쉬어줄 때가 필요해"
빵과 수제로 만들었다는 멜론, 딸기잼 그리고 우유를 맛있게 먹는다.
동시에 오늘 40km나 가야 하는 날이기에 아침을 빠르게 먹고 나설 준비를 했다.
수잔은 그런 나를 꼭 안아주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이런 친절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부엔까미노!
순례자들이 순례자를 향한 호의를 너무나도 당연시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면서,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출발!
오늘 5시, 6시부터는 비 예보가 있어서
그전까지 빠르게 걸어 도착하는 걸 목표로 힘차게 걷기를 시작했다.
큰 도시로 나아가는 길목에 어느덧 단풍이 물든 거리,
거리들과, 포도나무들의 거리거리들을 살핀다.
참, 아름답다.
순례길을 걸으며,
가을의 시작으로 젊음과 늙음이 공존하면서도 단풍의 향연이,
단풍의 무도회가 시작되는 스페인 조그만 마을마을들을 보는 게
참 재미있고, 좋고, 감사하다.
걷고 걷다가 점심으로 마트에 들러
조그만 배고픔으로 마트 안의 갓 구운 빵들을 먹는 게 참 감사하다.
걷고 또 걷고, 중간에 마트에 들른다.
오늘은 큰 마트가 없어 조그만 마트에서 빵을 사는데,
이후, 근처 성당 앞에서 먹는데, 마침 곧 미사가 있는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그맣게, 오늘도 무사히 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원을 빌고, 다시 출발했다.
노래와 라디오를 들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중간중간 약한 비도 내려, 우비를 쓰면서도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걷는데, 비가 점점 심해졌다.
여전히 가야 하는 거리가 10km 남은 상황.
한창을 오르막길을 올랐다가
오세브에리 마을부터는
노래에 맞춰 빠르게 올라가는데,
비가 더욱 거세지면서,
걷는 게 마냥 쉽지 않았다.
주어진 선택지는 오로지 '걷는 것' 하나 뿐.
정신력으로 발걸음을 끌고갔다.
비와 우박이 주는 추위를
그대로 맞이하며 눈 앞의 길을 견뎌냈다.
.
그렇게 힘겹게 걸어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도착하여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다행이다."
무사히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야.
식당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던 다른 순례자분들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수고했어."
결국 비바람을 뚫고
40km를 걸었다.
참 웃겼다.
첫날에 25km 걷고 헉헉대고
몇 킬로 걷고 하룻밤 묵고 그랬는데,
이제는 40km가 기본이 되어버린 사실이 웃기다.
'사람은 강해지는구나.'
사람은 강해진
끝 두 시간 동안은 비가 계속해 내려 힘들었는데,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비를 툭툭 털고, 침대에 짐을 풀었다.
이미 머리는 비에 홀딱 젖었고,
이미 거의 시간은 6시 정도였다.
'오늘 빨리 자는 게 낫겠다.'
생각은 이내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모자와 워머를 착용하여 추위와 씨름하며 잠들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수고하며 걸은 나 자신에게 토닥여주지도 못한 채
그저 이 추위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며 잠에 빠지려 노력했다.
<꿉꿉하다.
비에 젖었지만, 미처 씻을 수 없다.
너무 추워... 그래도.. 이불이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함에 정말 감사하다...
오늘 어찌어찌 40킬로를 걸었는데,
내일도 또 걸을 수 있을까.
비야 오지 마라... 해야 떠야 제발......
지금 돌아보면, 순례길 중에서
이 날이 가장 힘든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 힘들다고 생각하면, 정말 힘들어져서 주저앉게 되니까.
길 위에서 나는 결코 내 자신에게
지금 이 순간이 힘들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정말 힘들었고, 외로웠으며, 추웠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무엇보다 단단하고, 강했다.>
2023.11.02.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어제 비를 처절하게 맞으며 도착한 뒤,
충전기 단자에 물이 들어가서 충전도 못하고 출발했다.
도착해서 할 것들은 많지만 할 마음들도 없어서 결국 계속 잤다.
얼핏설핏 잠에서 중간중간 깰 때 창밖으로 들리는 바람소리는 매서웠다.
매섭도록 휘잉휘잉 부는 바람소리는 마치,
어릴 적 홀로 자는 방 안에서 창가너머로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연상시켰다.
지금 이 상태로 나가면 큰일 날 것같이 매서운 바람이었다.
친오빠와 만나기 위해서는 오늘 40km를 가야 하기에
일찍 출발하려고 했었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순례길 위에는 엄청난 폭풍이 치고 있었다.
6시여서 껌껌한데 아무것도 안보였다.
그리고, 엄청난 태풍이 기다리고 있단 듯이
엄청난 강풍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절대로 지금 나갈 수 없다.'
'오늘 40km를 갈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동시에
'가지 못하더라도 사모스까지인 20km를 가고,
다음날 아침 오빠가 사리아에 오기 전에 16km를 미리 가있는 방법도 있어.'라
오늘 꼭 40km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렇지만,
매우 깜깜한 밤에다가 무섭도록 치는 바람소리와 비를 보자니
속상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일주일 동안 맑은 하늘에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졌는데,
그 이후부터 계속 비바람이 몰아치는 게 속상했다.
더욱이, 목표한 거리를 날씨로 인해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속상하다.
그래서 날씨를 뚫고서라도 가겠다 생각하지만, 도저히 나갈 수 없는 날씨였다.
나가면 조난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나가야겠다고 생각해,
기다리면서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미래의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을 푸념하는 편지였다.
출발하려고 준비하는 두 순례자에게 물었다.
"오늘 어디까지 가세요?"
"사리아까지 갈 거예요."
폰도 꺼져서 지도도 없기에 그분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스틱이 바안에 있어서 바가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편지를 마저 쓰고, 스트레칭을 했다.
8시 정도가 되어 바가 열려 바 안에서 잠깐이나마 몸을 녹이고, 도장을 찍었다.
나가기 정말 두려웠다.
여전히 문 밖에는 소용돌이 같은 바람이 매섭도록 치고 있었다.
그러나, 미루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더 늦어지는 도착시간일 뿐이었다.
오늘 이 태풍이 그친다는 소식도 없었기에,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앞으로 간다’ 뿐이었다.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 앞에서
내가 갈 수 있다고 밖에 믿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고, 비는 많이 내리지 않는 정도였다.
딱히 풍경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빠르게 도착하는 게 목적였다.
우린 경쟁하는 무섭게 치는 바람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점점 많아지는 비에,
이미 홀딱 젖은 신발과 중간중간 미끄러져 넘어지는 순간들,
계속 맞는 비,
툭툭 떨어지는 비에 무거워지는 우비,
추운 손과 매섭게 손을 강타하는 바람,
미끄러운 바닥, 폭포처럼 흐르는 물,
고여있는 물웅덩이,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물줄기,
차가운 공기,
그리고,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듯한 거리가
오늘 내가 40km를 해낼 수 있을까란 의문을 더 증폭시켰다.
큰 마을이 보이기만을 기다리면서 정말 오로지 앞을 보며
걷는다는 심정으로 계속 걷고 또 걷고 또 걸었다.
오로지 앞만을 보면서
계속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어떠한 생각도 더하지 않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춥다는 생각도 없이,
다음 마을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걷는데, 우박이 내린다.
우박이 매섭게 내려 내 눈과 얼굴도 콕콕 찌른다.
'아니... 우박은 아니잖아.... 이건 너무 하잖아...'
속으로 외치며
속으로 울면서
동시에 지도가 없기에
네덜란드 친구들이 먼저 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걷는다.
그 뒤로 겨울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눈 내리는 순례길은 마냥 쉬운 게 아니었다.
앞을 알 수 없이 그저 계속 걷다가
T로 시작하는 마을의 문구가 보였다.
작은 문구이지만, 10km를 이 태풍을 뚫고 걸었다는 생각에 울컥함이 들었다.
어느새 사라진 네덜란드와 프랑스 친구들은 뒤로하고,
우선, 보이는 순례자 화살표를 보며 계속 걸었다.
울컥해하며 마을에 도착해
잔뜩 얼어붙은 손과 덜덜 떨리는 입술로 슈퍼마켓에 갔다.
이전 마을에서 마주쳤던 슈퍼 안에는 한국인 순례자가 있었다.
"저는 결국 30km 정도 택시를 탔어요.
오늘 이 마을에서 머물려고 해요."
꽤 오랫동안 혼자 순례길을 걷고,
더욱이 오늘은 거대한 태풍을 뚫고 걸어오다 보니
나는 한국인 순례자를 보자마자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토스트와 계란, 오렌지주스와 커피를 먹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잔뜩 젖은 신발과 양말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맛나게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먹으면서 여럿 이야기를 나눴다.
순례자분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내게 조언했다.
"지금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요."
"감사해요.
저도 지금 저의 오랜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하고 있어요.
그중에서 버킷리스트였던 순례길을 걷고 있죠.
이후에도 하고 싶은 게 무궁무진해요.
교환학생도 가고 싶고, 해외 인턴도 해보고 싶고..
여전히 하고 싶은 다양한 일들을 할 거예요.
세상은 넓고
하고 싶은 것은 많고
저는 아직 젊으니까요 (웃음)"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다행히 태풍이 그쳤다.
순례자 분과 헤어져
나는 다시 화살표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지도가 없으니, 내가 맞게 가는지 모르지만,
중간중간 보이는 화살표에 안심하면서,
중간중간 보이는 마을들을 감상하면서 걸었다.
그저 감사했다.
이렇게, 해를 보면서 걷는다는 사실이 이다지도 감사할 수가.
눈물이 났다.
그냥,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비를 맞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서.
실제로 태풍이 세차게 불지 않으니,
오늘 사리아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이 상태로 계속 좋다면, 나머지 20km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저 생각을 비우고 계속 걷기도 하고,
빠르게 걷다가 중간에 멈추기도 하고,
감사함에 눈물도 흘리고,
빨리 걷고 싶은 마음에 빨리 걷기도 했다.
길 위에 순례자를 위한 쿠키가,
사람들의 나눔 정신이,
이 햇살이,
날씨의 아름다움이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왈칵 났다.
감사함에 또 걷고, 걷다가 다시 비가 와서,
해가 뜨게 해달라고 빌면서 다시 또 걷고, 걷고, 걸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사리아의 도시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해가 뜨는데,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래서 다시 엉엉 울었다.
내가 사리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태풍이 멈추어 햇살을 볼 수 있음에,
오늘도 또 한걸음 걸어왔다는 사실에,
여전히 너는 할 수 있다고,
걸을 수 있다고 나를 토닥여주는 것만 같아서,
여전히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햇살을 맞으며 펑펑 울면서 걸었다.
그렇게 사리아에 도착했다.
오빠와 내일, 만날 수 있겠구나.
그래도, 2일까지 사리아에 온다는 것을 내가 해냈구나.
감격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잔뜩 젖은 양말과 신발을 빨았다.
따뜻한 알베르게에 몸을 녹이며 생각했다.
드디어 내일,
친오빠와 만난다.
걸으면서 오빠와 매일 40km씩 걸을 수 있을까?
이미 나부터가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순례길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동시에, 생각했다.
'오빠와 함께 하니, 더욱 힘이 날 거야.
가지 못하더라도 30km도 가능하니 무사히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하자.'
지금 이 순간
발냄새 가득한 방일지라도,
따뜻한 이 방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이,
고생 가득한 발을 다독였다는 사실이,
근처에 슈퍼마켓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내일 오빠와 만난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오빠와 앞으로 근 한 달간의 여행이 어떻게 펼쳐질까에 대한 기대와
순례길도 어엿 4 일남짓 밖에 안 남았다는 아쉬움 등
여러 가지가 뭉쳐져 사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채웠다.
모쪼록, 내일은 날씨 요정도 내일 우리와 함께하길.
조용히 기도하며 잠에 빠졌다.
감사합니다.
또 감사합니다.
▶ 스페인 I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7)에서 계속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the_daisy_path : 인스타그램
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나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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