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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I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7)

데이지 버킷리스트 ②⑦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by 여행가 데이지

*본 글은 세계일주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작성한 일기입니다. 가볍게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지난 이야기 (1) 걸으면서 생각해 볼게
(2) 삶에서 쉼을 주어 만난 사람들
(3)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고
(4)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면, 그건 지루할 거야
(5) 나만의 속도로 걷는 거야
(6) 주어진 선택지는 '앞으로 간다' 뿐이야



순례길 24일 차: 어 오빠, 왔어?

2023.11.03.



감사하게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걷기도,

홀로 고독하게 한계에 도전하며 걷기도 하며,

사리아에 도착했다.

앞으로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100km가 남았다.


사리아에서 부터는 친오빠와 함께 걷는다.


오빠와 만나기로 한 날,

일찍 출발해야한다는 생각 없이 푹 잠든 뒤,

7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무언가 일이 꼬이는 느낌이 들어도, 하루는 흐른다.

젊은이들은 옆에서 와인잔을 펼쳐 까미노 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머리가 다 까진 노인은 쇼파에 앉아 까미노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른 노인은 오렌지를 깐 뒤,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11월 3일. 오늘 하루가 이렇게 흐른다.


오늘 아침은, 꽤나 잘 잤다.

어제 오랜만에 일기를 쓰고 자는 일상을 보냈다.

난로 위에 널어놓은 양말과 신발 덕분에 발냄새가 진동했지만,

오랜만에 따뜻하고 편안하게 잠들어서 좋았다.


일어나니 공장히 바보같은 꿈을 꿨다는 느낌을 받았다.

굉장히 바보같았던 꿈이었는데, 자세하게 기억나지않는다.


신발이 아직 다 마르지않아 난로 위에 신발을 두고,

어제 기부제로 제공되었던 오렌지를 까먹는다.

휴대폰 단자는 젖어서 마르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이 마르기를 바랐다.


카페에서 여행 계획을 세우다보니 10시가 되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오빠가 카페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오빠 !!!!"


문 밖으로 나와 오빠에게 외쳤다.

생전 해외에서 만난 적 없던 오빠.

스페인 작은 마을에서 재회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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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오빠 신용환군과 함께 순례길을 시작하며




오빠와 세계일주를 시작한 뒤로 오랜만에 만났지만,

마치 어제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가워!'보다, '왔구나!'의 느낌이었다.


"어, 왔어?"


우린 짧게 포옹을 마치고 슈퍼에 가서 음식 꾸러기를 샀다.

햄과 치즈를 얹어 슈퍼에서 먹으며

오빠가 한국에서 스페인 작은 마을에 오기까지의 3일간 여정을 들었다.



"중국 공안들이 계속해서 나를 검사했어..!

스페인에 왔을 때, 버스 정류장에서 정말 우연히 버스를 타게 되었다니까!"



오빠는 빵도 먹지않고 마구마구 말들을 쏟아냈다.

3일동안 환승도 하고, 기차, 버스도

스스로 탄 여정을 매우 흥미로워했다.


여행의 시작점에서

벌써부터 여러 가지 사소한 것들에 반응하고,

신기해하는 오빠의 모습이

마치 내가 여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첫 국가였던 일본에서 공항 가는 과정에서부터 마음졸이고

순간의 조그만 선택에도 떨려했던 순간들.


한참 첫 설렘을 이야기 나누다가

우린 크레덴셜 발급을 해주는 카페에 갔다.

걷다보니 문득, 오빠가 스페인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오빠! 우리가 지금 스페인에 있어!"


잔뜩 신난 채로 크레덴셜을 받았다.

호기롭게 시작을 외치며 남매의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오빠는 말했다.


"오늘 40km를 가야하는 거의 계획에

차질없이 해내볼게!"


우리는 함께 걷기 시작했다.

짧게 그동안 어떻게 지내는지도 이야기 나눴다.

출국 전까지 오빠 집에서 살았기에,

오빠는 내가 출국한 뒤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었다.


"예진, 너가 출국하고 한달동안은 크게 공허하더라."



최근에 연락한 친구도 같은 말을 했었다.

주위에서 나의 빈자리를 느낀다고 했을 때,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큰 힘이 되고,

큰 존재가 되어준다는 사실이 고맙고 좋았다.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되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가 조금씩 성숙해지는 사실이 실감났다.


"나를 유럽으로 불러줘서 고마워.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나의 에너지를 받아 자기도 조금 태도를 바꿔보고 싶어. "


나는 여행하면서 느꼈던 것들, 있었던 일화들을 이야기 나눴고,

오빠는 고민과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다.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순례길 위에서 풀을 뜯어 먹는 소를 지나쳤다.


"예진아, 너는 저런 소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어?"


"나는 네팔에서도 히말라야를 걸으면서 만난 소가 생각나."


"나는, 저 소의 근원은 무엇일까?

소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같은 의문이 들더라."


"오빠, 탐구정신이 꽤나 높구나!!"


오빠는 순례길을 걸으며

중간에 멈추어 사진도찍으며 풍경을 음미했다.


"이런 목가적이고, 시골적인 풍경이 참 좋다."


힘겹게 오르막을 오른 뒤에 오빠는 말했다.



"공기가 정말 상쾌하다."


오빠와 함께 걷다보니 문득 떠올랐다.

그동안 비를 맞으며

오로지 목표물에만 전념하며 걸어왔던 순간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이 차갑고도 상쾌한 공기가 우리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는거 같아."


우리는 상쾌하고, 차가운 공기를 함께 듬뿍 마셨다.



중간에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감사하게도, 많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감사함을 가지며 걷고 또 걸었다.


한 15km 정도 걸었을까,

오빠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잠시 버스 정류장에서 쉬며 오는 길에 딴 사과를 먹었다.


"꿀맛이지?"


"응. 완전."


푸르게 잘 익은 사과는

순례길 위에서 비타민이 되었다.

오빠는 점점 느려지는 걸음 속에서

사과를 먹으며 말했다.


"걷는게 마냥 쉽지 않네."


우린 10km만 더 걸어보고

30km가 되었을 때 다시 쉬기로 결정했다.

다시 큰 마을을 지나가며 걷는데,

오빠의 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예진아,

나는 앞으로 더 걷기에는 힘들 거 같아."


오빠는 오랜시간 비행을 하고,

밤 버스를 탄 뒤에

거의 15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걸어왔기에

그의 피곤함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처음에 생장에서 출발할 때 25km 걷고 엄청 힘들었거든.

오빠는 무거운 배낭으로 여기까지 걸은게 정말 대단한거야!"


오빠는 미안해하면서도 고마워했다.

나는 진심으로 오빠가 대견했다.




한국에서 오빠와 나는

정은 찾아볼 수 없는 남매였다.

서로에게 관심도 없는 남매.

순례길 위에서 오빠를 다시 만나고는

오빠가 나를 위해 배려하는 모습과

나도 모르게 오빠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게 신기했다.


나, 가족을 꽤나 챙기는 사람이구나.

나중에 남들에게도 가족처럼 챙기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예진아, 10분만 더 쉬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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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겠다는 듯, 휴식을 호소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다리 풍경을 보면서 잠깐 쉬었다.


"지금까지 700킬로를 걸은 네가 참 대단하다."


"마냥 쉬운 길이 아니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비를 맞으며 홀로 걸어오는데,

해가 뜨는걸 보니가 눈물이 절로 나오더라.

속도에 상관없이 꾸준히 끝까지 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고 있어."



15분만 더 힘내서 가보자는 나의 말에

오빠는 힘을 내어 다리를 건넜다.

우여곡절 20km의 첫 순례길을 마친 오빠는

누구보다 피곤한 표정으로 행복해 했다.


우린 내일 계획을 세웠다.

동키 시스템으로 오빠 배낭을 미리 목적지에 보내고

40km를 걷기로 했다.

씻고 난 뒤, 피곤에 휩싸인 우리는

오후 6시임에도 곧바로 잠을 청했다.


잠들기 전 천장을 바라보며 요근래 드는 생각을 돌아봤다.


하루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하고싶다.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고,

진정으로 길 위에 있는 이 순간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는게,

비가 안 내릴 때,

날씨가 좋을 때 최대한 많이 걸어놓아야 하고,

체력이 남았을 때 최대한 빠르게 가야 한다.


나는 목표한 양이 있고,

그 양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전히 길을 즐길 수 없어왔다는 것.



20231103_173023.jpg 알베르게에 도착한 뒤


목표한 40km를 걷지 못했지만,

20km를 오빠와 함께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오빠가 스스로 걸을 수 있다고 되뇌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모습이 참 좋았다.



카메라를 들 때, 밝게 웃으며 브이를 하는 모습이 참 좋다.

책임감 있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오빠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이번 여행에서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싶다.



어느덧 순례길도 3일남짓 남았다.

이 순간이 참으로 소중하면서

동시에 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하고싶다는 생각이다.

내일 날씨도 해가 뜨기를,


감사함이 참 가득해지는 길 위에서,

오늘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참, 소중하다.

순례길 위의 소중함들을 느끼면서 조금이나마,

지금 그걸 남기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감사하고, 좋다. 졸리다....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겠으나,

90킬로 남짓밖에 안남은 이 순간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700킬로의 순간들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끝나고 편안하게 혹은

매우 불편하게 알베르게에서 묵어오면서,

한층씩 더욱 더 나의 어설품을,

나의 모자람을,

나의 이기심을 느끼면서

언제나 감사함을 가진다.


오늘도 부엔까미노!

내일도 햇살이 가득하기를.







순례길 25일차: 조금씩 조금씩

2023.11.04.





피곤에 휩싸인 채로 오빠는 잠에 빨려들어갔다.

오빠의 엄청난 코골이 덕분에 나는 방 안서 같이 잠들지 못했다.

도저히 잠들수가 없는 코골이었다


같은 방에 있던 다른 순례자가 잠들었다는 사실이 미스테리였다.


결국 나는 다른 방으로 피신해 밤을 보냈다.

춥게 골골대면서 담요에 의지해 잠든 밤이었다.

새벽 6시, 밖은 비가 주륵주륵 내리지만,

감사하게도 태풍과 같이 폭풍처럼 내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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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코골이가 그렇게나 클 수 있어?


오빠의 배낭을 동키시스템으로 보낸 뒤 7시즈음 출발했다.


여전히 해가 뜨기 전 시간이기에

스페인의 새벽은 어둡다.


어두운 거리거리를 뚫고 내리는 부슬부슬 비를 맞는다.

그러한 부슬비와 거리를 뚫고 걷는 리듬까지.


어두운 새벽 거리들을 조금이나마 비추는 가로등은

우리의 길을 밝히며 유럽 거리의 느낌을 더했다.


프로스미스 마을에서 나오는 길.

숲속을 뚫으려 산을 넘는데

비가 점차 심해지더니,

온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젖은 신발로 휴대폰 전등과 우리의 직감에 의지하며

걷고 또 걷는다.


어두운 새벽이면서 비가 억수로 내리고,

여전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길고 길었다.

우린 묵묵히 앞만 보면서 걸었다.



오빠와 간격이 벌어진 채로 걷기도,

억수로 불어오는 바람을 뚫고

노래를 들으면서 걷기도,

그 노래에 의지해 생각을 온전히 비우고 하며

그저 걷고 또 걷는다.


오빠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예정된 여행 계획을 마추기 위해서

오늘은 무조건 40km를 걸어야 하는 상황.


점점 강해지고 그칠 줄 모르는 비바람에

나조차도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로지 내가 걷는 발 앞만을 보면서 걸었다.

눈 앞에 있는 길만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10km 정도를 걷다가

갈림길에서 오빠를 기다리는데,

비바람을 맞으며 처음 걸어본 오빠는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온통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서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못가."


오빠는 고통 속에서 선언했지만, 우리는 알고있다.

우리 앞에는 가야한다는 선택지밖에 없다는 것을.


"지금 도로변에서 추위에 떨면서 그저 바닥에 앉아 쉬는 것보다

우선 다음 마을까지 가는거 어때?"


오빠를 타이른 뒤에 꾸역꾸역 오빠와 함께 걸었다.

서로가 정신이 혼미하지만,

우선 다음 마을까지 가자는 목표아래에서 계속해서 걸었다.


"오빠 뭐 먹을거야?"


고통 속에서 아무말도 못한 채

오빠는 아무거나 시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급하게 발견한 조그만 가게.

코코아 두잔과 샌드위치로 몸을 녹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순례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분이었다.


"안녕하세요!"


힘들어하는 오빠로 나도 힘이 부쳤는데,

새로운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밀려왔다.

오빠와 나이가 같은 순례자는 호준오빠.

우린 코코아가 비워질 때까지 이야기 나눴다.



20231104_135114.jpg 새로 만난 순례자 호준오빠와도 함께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에 뛰어든 호준 오빠.

2년 정도 일한 뒤 퇴직금으로 산티아고를 찾았다.

정육 기술을 배워 워킹홀리데이로 가고,

이중 격투기 선수 챔피언의 꿈도 갖고 있었다.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며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계획해 살아가는 모습이 멋졌다.


그렇게 우린 오늘 목표를 향해 같이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따로 걷기도 하고,

또 여러 이야기도 나누면서 걷다가

해가 떠올라 해가 떠오름에 감사도 하고,

다시 비가 오면 또 능숙하게 비를 맞으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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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사상 처음으로 후하게 이것저것 시켜셔 먹었다. 고기와, 피자 그리고 사랑하는 감바스! 마침 난로도 따뜻하고, 바도 좋아서 배부르고 좋게 또 여러 이야기들도 나누면서 먹었다.



오락가락한 비 속을 함께 걸었다.

친오빠는 어디가 아프기 시작했는지

혹은 투정버튼이 시작되었는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먼저 떠나는 우리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오빠.

기다리고, 다시 출발하고, 또 다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아.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다시 만날 때마다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오빠가 귀찮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오빠가 고마웠다.

그 속에서 나도 스스로 한계를 넘어가며 정신력을 붙잡았다.


20231104_143901.jpg 산티아고까지 65km 만을 앞둔 상황 !


그렇게 열 감정이 교차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오후 5시 반이 되었다.

한계에 왔는지, 오빠는 투정을 더 심하게 했다.


급기야 바닥에 주저 앉아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못가."


오늘 알베르게까지 10분 남짓 남은 상황.

오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간다' 밖에 없었다.

나는 오빠에게 위로도 하지 않고 그냥 갔다.


오빠는 욕지거리로 온갖 투정을 부리면서도

다시 조금씩 따라왔다.


그 모습은 마치

강아지에게 간식으로 유인해 따라오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전화를 한 통밖에 안할 수가 있어?"


나는 오빠의 투정을 들으며 나를 찾아오는 감정을 맞았다.


오빠가 계속해서 투정부리는 모습이 싫었다.

어린아이처럼 자꾸 의지하려는 모습이 싫었다.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면서 걷는게 싫었다.


서로가 예민해진 상황.

우리의 목적은 순례길을 걷는 건데,

서로에게 감정낭비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일단 도착하고 얘기하자"


오빠는 다시금 묵묵히 나를 따라오더니 말했다.


"예진아, 너도 힘들지?"


처음으로 내 심정을 살펴준 오빠의 말을 들으니

투정부리는 오빠에게 가진 미운 감정이 미안했다.

작지만 소중한 오빠의 공감을 받아 우린 힘을 내 계속해서 걸었다.

다함께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행복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알베르게 따뜻한 물은 어찌나 좋던지,

그저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샤워하는게

이렇게나 감사하고 행복한일인지 다시 느꼈다.



영락없이 아이처럼 투정부렸던 오빠.

휴식을 조금 취하고나서, 이전 언행이 미안했는지 사과했다.

우린 묵게된 마을(멜리데)에서 유명하다는 뽈뽀로 오늘 저녁의 성과를 축하했다.



"호준 오빠, 오늘 우리 오빠가 툴툴거리고 투정부렸는데도

내색없이 챙겨주고 도와줘서 고마워."


뽈뽀로 하루 저녁을 마무리 한 뒤,

잠들기 전 침대에서 오늘 느낀 감정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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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로 내려 땅만 보고 걷는데 속상함이 밀려왔었다.


'순례길 풍경도 음미하면서

'걷는 행위'의 의미도 느끼고 싶은데,

영락없이 계속해 내리는 빗줄기가 속상했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생각도 들었다.


'또 언제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비를 맞으면서 8시간을 걸어보겠어!'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이런 걸음 역시도,

하나의 인생의 연속이니까!


20231104_093431.jpg 비가 그치고


인생의 모든 순간이 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걷는 길처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도 있고,

우박이 내리는 날도 존재하며,

그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하고,

무지개에 기뻐하며,

빗길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투정부리고 불평하는 오빠에게 느꼈던 미움,

그 속에서도 나를 공감해준 오빠에게 느낀 감사함,

나를 스쳐간 모든 모순적인 감정들을 돌이키며 생각했다.


순례길은 참 인생과 같구나.







순례길 26일차:

2023.11.05.




이불이 없었지만,

알베르게가 따뜻해서인지 오랜만에 푹 잠들었다.

부스럭 소리에 일어났다.

시계 바늘은 6시 40분을 가리켰다.


아침에 동키 서비스 관련처리를 하느라 오빠들은 먼저 출발했다.

오랜만에 노래를 들으며 혼자 걷기 시작했다.


비는 오다말고를 반복했지만,

어제처럼 강풍이 들이닥치지 않았다.

꿋꿋히 견디며 홀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여유를 한 껏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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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보니 오빠들이 보였다.

조금 심각해보이는 상황을 느끼며 다가갔다.

물집이 심하게 잡힌 친오빠가 압박붕대를 풀고 잠시 쉬고 있었다.

호준 오빠는 말했다.


"이렇게나 힘들면,

택시나 버스를 타는 것도 방법이야."


오빠는 그간의 고통을 줄곧 참아왔지만,

본인도 계속해서 걷는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나에게 물었다.


"그래. 예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오빠가 힘들어하는걸 충분히 이해하지만,

솔직한 내 심정을 말했다.



"오빠가 지금까지 걸어온 60km가 아까워.

지금 힘든건 이해하지만, 결국 택시를 타고 마무리하게된다면,

난 오빠에게 많이 실망할거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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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에서 비가 갠 뒤


자꾸 어린아이처럼 구는 모습이 짜증났다.

툴툴거리며 욕하는 모습은 보는 나 조차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오빠에게 느껴지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싫었다.

동시에 그럼에도 오빠를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팽배하게 존재했다.


우린 편의점에서 산 초콜릿과 빵을 먹으며 거리에 앉았다.

15km를 걸어 목표의 절반칭를 온 상황이었다.


"예진아, 나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야."


"그래.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간다' 밖에 없어.

그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건 우리만 손해이지.

걸어가면서 힘이 되는 생각을 하는데 더 나아."


점심 먹기 전에 주륵주륵 내리던 비에 햇살이 채워졌다.

우리를 비추는 햇살에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


"오빠, 오늘은 내 속도대로 갈거야.

오빠도 오빠 속도로 맞추어 걸어봐."


우린 각자만의 속도로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남은 15km를 홀로 걷기에 오빠는 크게 다짐하며 말했다.


"처음에는 너의 속도에 맞춰서 걸어볼게.

나중에라도 포기하지 않고 걸을게."


출발하려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거세기는 빗방울이지만,

오빠는 나의 속도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아 !!!"


중간중간 고통에서 나오느 아우성도 지르고

짐승처럼 헉헉 거친 숨소리를 내보이지만,

그는 소리지르며 계속해서 걸었다.


"할 수 있다!!!!"


꿋꿋하게 걸어오는 오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하는 오빠가 고마웠다.



자꾸만 불평하는 오빠와 같이 걷기 싫고,

부정적인 오빠에게 영향받는게 싫으면서도

바뀌고자 노력하는,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오빠 모습에

괜시리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빠와 조금씩 벌어지는 간격에 따로 걷기 시작하며

새로운 순례자와 인사를 나눴다.

오렌지를 건네며 순례자는 말했다.


"월요일에는 일기예보가 좋아요."


우리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게 될 월요일.

화창한 예보 속식을 받으며 더욱 힘을 내어 걸었다.

지나가던 순례자는 라벤더를 비벼 내게 선물해주었다.

나눔을 아는 손길이 참 곱고 예뻤다.


걸어야하는 km가 조금씩 작아졌다.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지난 800km를 걷던 순간이 밀려왔다.

갑작스런 기억들에 울컥함을 느꼈다.

순례길이 어느덧 벌써 끝이 되었다는 사실,

순례길 이후의 진짜 다시 여행이 시작될거라는 사실 등

머릿속에 생긴 공백을 차지하는 무수한 생각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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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가 억수로 내리다가 다시 그치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비가 내려 땅만보고 걷는게 익숙해질 무렵,

다시해가 뜨면 또 눈물이 왈칵흘렀다.


비가 한창을 내리다가 개었지만,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비를 흉내내며 계쏙 떨어진다. 귀엽다.


빗물이 무섭도록 내려

땅을 가득채웠다.

이로인해 생긴 진흙은 질퍽질퍽하게 내 신발을 적셨다.



진흙에 움푹 패여 결국 신발이 다 젖고만다. 이런!

빗물이 고인 부분들을 요리조리 피해 걸어보려하지만,

결국 다 젖고만다.


동시에, 비로인해 생긴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봤다.

빗물이 강해져 거센 물살의 강들을 이룬다.

길목길목마다의 조성된 숲같은 거리들은

영화같이 아름다운 장면의 연속이었다.


갖가지 감정과 생각이 교차하고

질퍼한 진흙길, 아름다운 숲속 길을 교차해 걷다보니

오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우리의 마지막 알베르게가 되는 곳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위해

우린 피자를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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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순례길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네.

다들 심정이 어때?"


호준 오빠는 말했다.


"실제로 보면 그냥 별일이 아닐것같아."


"오빠는 감격했을 때가 어떤 순간이었는데?"


"격투기 대회에서 이겼을 때 감격한 감정을 느꼈었지.

너는?"


"나는 엄청 많아.

감동하기를 잘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순례길을하며 걷다가 해가뜨면 해가뜸에 감격하고,

걸을 수 있음에 감격한거 같아.


내일 도착하면 또 얼마나 눈물을 흘릴지 이미 예상이 돼 (웃음)"



저녁을 마친 뒤,

멍때리며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비우니

문득 오늘이 정말 마지막 밤이라는게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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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순례길의 순간들


기나긴 여정 끝에 오늘이,

어느덧 산티아고 가기 전 마지막 밤이라니.



내일 20킬로만 걸으면 나는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시작해 쭉 걷고 걷는 여정이 내일이면 막을 내린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구나.

그동안 정말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기도했고,

혼자서 여러 생각들도 했고,

그저 아무생각없이 계속 걷기도 했다.


오빠를 만나고 한켠에 조금의 부담, 짐과 짜증이 생겼지만,

동시에 오빠에게 무언가 성취감을 안겨줄 수 있는 경험이될거같아 기쁘다.


그리고, 내일은 산티아고를 둘러보고 포루투갈로 간다.

다시 여행을 시작하게되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시작 전에 손톱과 발톱을 바싹 잘랐는데,

어느새 길게 자라버린 손톱과 발톱을 보니 또 감회가 남다르다.


홀로 걷기 시작하며

비바람을 맞으며 걷던 순간,

눈 앞의 한 걸음만을 바라보며 걷던 순간,


'조금만 더 걷자.'


오로지 이 생각으로 걸어온 지난 날들.

좋은 인연들과 보낸 지난 날들,


여행하듯이 행복하게 걷기도 하고,

진지하고 철학적인 질문들을 하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오랫동안 안들었던 노래도 실컷듣고,

그저 멍때리면서 걷기도하고,

아무 생각없이 걷기도 하고,

생각을 비우고 그저 걷는 것을 꽤 많이했다.

꽤나 좋은 시간이었다.


과거와 미래를 가득 생각하면서 생각에 가득차 걷기도 하고,

과거를 생각하며 과거를 씻어내리기도했으며,

미래를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확신과 새로운 상상으로

미래의 새로운 면모를 그려내기도했다.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이 가져온 감정선을 곱씹는다.

감정은 마음을 얇게 간지럽힌다.


간지러운 마음 끝에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부엔까미노!







순례길 27일차: I hear a symphony

2023.11.06.



마지막 날에도 친오빠의 코골이를 당해낼 수 없었다.

코골이를 피해 히터와 떨어져 잠드니 추위에 4시에 일어났다.

일어나 멍도 때리며 정신없이 끝나가는 유럽 여행을 돌아봤다.


정신없이 유럽 여행을 마치고,

순례길을 시작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쭉 걸어오기 시작한 그 날의 종지부를 찍는구나.


정신없이 걷고 또 걸으며 어느덧 마지막 날.

우리는 20km 뒤로 산티아고 대성당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걸음을 순조롭게 시작했다.

도로를 뚫기도 하고, 숲 속을 걷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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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갠 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순례길에서


감사하게도 우리를 계속 괴롭혔던 비는 내리지 않고

아름다운 별들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오빠들이 좋아하는 이디엠 노래에 맞춰

리듬감있게 걷다보니 1시간도 안되었는데 4킬로를 걸었다.


비가 개고 해가 뜨려고 날씨가 좋아지려는지

하늘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구름이 짙게 땅까지 내려앉아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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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흐르는 속도 앞에서 친오빠는 조금씩 뒤쳐졌다.

대성당 미사를 보기 위해서 빠른 속도를 유지해야하는 상황.

그럼에도 나는 오빠와 산티아고 대성당에 함께 보고 싶었다.


저녁 버스로 바로 포루투갈로 떠나는 우리는

오늘 낮 12시에 진행되는 미사가 유일한 기회였다.

12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어느새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오빠는 그런 마음에 부흥하지 못한 채, 조금씩 뒤쳐지고 있었다.


"오빠, 할 수 있어.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해"


오빠를 다독이고, 응원을 불어넣었다.

신나는 노래에 맞춰 하나 둘, 하나 둘을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오빠의 걸음을 얼마가지 않아 다시 느려졌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나에게 오빠는 답했다.


"나도 마음은 빨리 가고 싶은데,

몸이 안따라줘."



친오빠와 함께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말했다.


"오빠가 몸이 안 따라 준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몸은 안 따라주는거야.

오빠가 머릿속에 있는 그 생각을 없애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야지.

오빠, 지금처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채워봐."


나는 빠르게 걷다가 벌어지는 간격에

오빠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어느덧, 10km가 적힌 비석을 지나쳤다.


"오빠, 10km만 남았어.

우리 갈 수 있을거같아!"


오빠는 내 말을 듣고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예진아, 먼저 가."


나는 오빠 말에 당황해하며 이유를 물었다.


"너가 나의 속도에 맞추다가

너까지 미사를 못볼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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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말하면서 코끝이 찡한채로 울먹거렸다.

나도 그런 오빠를 보면서 괜히 울컥했다.

오빠의 마음이 공감되지만, 나 역시 오빠를 기다려주고,

미사를 포기한 채 함께 가주지 못한 미안함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 역시 그랬다.

함께하는 소중함보다

우선 내가 경험하는 소중함을 우선시하며 살아왔다.


순례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요 미사를 봐야하고,

오빠와 함께 끝까지 이야기하며 걷는 것보다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울컥한 채로 오빠와 헤어져

나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남은 건 어느덧 2시간 남짓.

조금씩 속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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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히던 비와 우박이 그쳐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 연속으로 펼쳐졌다.

조금씩 떠오르는 햇살이 나무숲에 번져 주홍빛의 빛의 향연을 만들어냈다.

수증기로 가득해져 무거워진 구름은 바닥까지 내려와 마을의 운치를 더했다.

비가 개어 무지개도 저 멀리 보인다.


나는 앞선 순례자들을 쏙쏙들이 추월하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얼마 만큼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비석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점점, 지난 시간, 내가 수없이 목표하며 향해온,

나를 포기하지 않게하고,

한 방향으로 가게 만들어 준 목표지점인,

산티아고가 다가왔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어떤 느낌일까?

어쩌면 펑펑 울겠지.


수없이 상상해온 순간,

줄어져 가는 비석의 숫자로,

지도상에 보이는 나의 위치로

점차 내가 가까워짐을 느낀다.


문득 몰려드는 울컥함을 맞이하며 떠올렸다.


어릴 적, 내가 언제 순례길의 꿈을 꾸게 된 거지?



그래, 언니가 내게 읽으라고 추천해준, 까미노 책 덕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즌, 여행 유튜버들에게 메일도 보내며 여행을 꿈꿨던 지난 날들이 생각난다.

걷는 걸 좋아하고,

한 달 동안 걸으며 만나게 될 여러 인연들에 설레하던 지난 나의 모습이 문득 생각난다.


나도 그런 책을 쓰고싶다.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다.


어린 소녀의 꿈을 꾸게해준 그 순간,

그리고 지금 직접 이 길 위를 걷고 있는 순간,

28일 동안 빠짐없이 걸으며 생각하고, 고민하고, 꿈꾸고, 되돌아보고, 느끼는 이 순간을

사람들에게 만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해오는 이 순간의 울컥함을,

삶이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지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산티아고 도시가 저 멀리 조금씩 보인다.

비가 짧게 왔다가 그쳐생긴 무지개도 보인다.

아름답다.


길 위를 걸으면서 보아온 수많은 무지개가 스쳐 지나간다.

정말, 곧이어 끝이구나.

비가 조금씩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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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마을에 도착하면서



산티아고에 들어와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한다.

내가 어딜 향하는지도 모른채 쭉 걸어온 그 산티아고,

산티아고의 거리를 걷고 있다.


그 감정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8분을 남짓두고 미사가 시작되어서 빠르게 짐 둘 곳을 찾는다.

12시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니, 이미 미사는 시작되었었다.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물끄러미 미사를 바라본다.


물끄러미 이해되지 않는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바라본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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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산티아고 대성당 내부



오빠의 울컥한 목소리,

혼자 걷고 걸어 정신없이 도착한 산티아고,

방금 일어난 일들을 물끄러미 떠올리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았다.


다함께 일어나 기도를 드릴때도 나는 그저 앉아서 멍때렸다.

아무 생각없이 계속 멍때렸다.


내가 도착했구나.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성당에 오기 위해 지난 28일동안 걷고 걸었구나.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무릎꿇고 기도했다.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눈을 감아도 사정없이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흐르는 눈물에 두손을 꼭 모아 기도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이렇게나 내가 나약한 사람이라는걸 깨달았기에,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미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니, 계속 눈물이 나왔다.

사정없이 흘렀다.

지난 순례길이 내 생각을 거치지 않고 감정으로 바로 흘러나왔다.

흘러나오다 못해, 사정없이 쏟아졌다.



미사를 끝내고, 성당을 둘러보려는데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미사를 하느라 연락 확인을 못해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아니, 언제 나와? 아까 도착해서 계속 기다렸잖아."


오빠의 투정을 들으니 나도 짜증이 났다.

오빠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너무나도 싫었다.

꿈이 없고, 세상에 회의적인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성당을 나오면서 오빠를 미워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어떻게 이렇게나 부정적일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별로지?

짜증내고 툴툴대는 신용환이 싫었다.

오빠에게. 상처줄 말을 잔뜩 장착한 채로 광장으로 씩씩대며 걸어갔다.


그런데, 저 멀리 광장에서 오빠를 보는데,

오빠를 향한 모든 미운 감정이 사라졌다.

오빠에게 날리고 싶언 무수한 욕들은 다 사라지고,

그저, 오빠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오빠를 보자마자 꼭 안아줬다.


"우리 오빠, 고생많았네.

수고 많았어."


동생 말 듣고 120km 걷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여러 한계도 넘었을테고,

혼자서 힘든 순간도 많았을텐데,

이렇게 산티아고에 도착했구나.

우리 오빠, 참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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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식으로 걸어오는 내 속도를

다른 일반인도 따라가기 힘들었을 텐데

생전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적 없는 이가

나를 따라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저 오빠 속도 맞춰서 함께 걸어주면 되는데,

내 속도에 오빠를 맞추려고 했을대에도

나에게 무어라 하지 않은 오빠가 얼마나 감사할까.


오빠의 넓직한 등을 껴안으며 말하는데

나도 울컥했다.


오빠도 나 몰래 눈물을 훔쳤다.

포옹을 마치고서 오빠는 말했다.


"오늘 너랑 헤어지고 결국 힘들어서 주저 앉아있었어.

그때 지나가는 프랑스 친구가 나를 다독이더라고.


'힘들지? 나랑 같이가자! 일어나!'


그 친구가 나한테 사과랑 물을 나눠주고 함께 걸어주었어.

그 친구가 준 사과를 받고 끝가지 힘내서 올 수 있었어."


그 프랑스 친구에게 고마웠다.

오빠에게 소중한 가치를 알려줬구나.

삶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주었구나.


우린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호준오빠는 어제 예상한대로 덤덤했고,

우리 남매는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성당에서부터 흐르던 눈물이 계속해서 났고,

오빠를 위로해주면서 나도 위로를 받았고,

오빠의 눈물을 보는데, 나도 눈물이 났다.


"내가 살면서 성취감이란걸 느낀 적이 없다고 했잖아.

이번 사리아에서부터 120km를 걸으면서 조금은 알 것도 같아."


우리가 지금 함께 흘리는 눈물은 오빠에게 알려줬다.

자기가 무언가를 노력해서 그걸 얻었다는게

얼마나 소중하고, 눈물나는 일인지를.


"오빠, 축하해.

오빠는 무엇을 하든 잘해낼거야."


우린 성당을 다같이 둘러보고

성당 밖 햇볕에 앉아 눈물을 말렸다.



이후, 우리의 축하 식사를 위해 우리는 성당 바로 옆에있는 타파스 가게에 갔다.

가서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로 식사를 먹었다.


수고했다 예진아, 너의 프랑스길 순례길,

너만의 길 위에서 너만의 깨달음을 얻고,

함께하는 소중함, 혼자의 소중함, 등 여러 가지를 느꼈구나.



이후, 순례길 인증서를 받았다.


얏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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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완주했다!


오빠도 인증서를 받고 매우 행복해했다.

뿌듯하다.


내일 피스테라 떠나는 호준오빠와 헤어진 뒤,

우린 포루투갈로 우리만의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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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루투갈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그때 나눠먹은 젤리는 무엇보다도 맛있던 젤리였다.


버스정류장에서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비롯해

지난 순례길을 회상했다.


버스에 오르니 편안함이 몰려와 눈꺼풀이 감겼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의 감정들이 뒤섞였다.

그 감정은 포루투로 가는 버스 안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날아가듯이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그때 나눈 우리의 대화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그 대화를 사랑했는지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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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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