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세계일주 버킷리스트 ④⑨ : 튀르키예 파묵칼레에 발 담그기
앞으로 여행에서 정해진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앞의 비행기 표도, 여행사 투어도, 일말의 조그만 계획도 하나 없었다.극강의 계획형인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세계일주 150일이 넘기는 했나 보다. 여행이 주는 속도에 맞춰 눈앞의 순간만 봤다. 예측불가능한 상황을 지탱하는 건 어릴 적 작성한 세계일주 버킷리스트. 오늘 하루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어릴 적 꿈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에 확신을 줬다. 나는 버킷리스트를 위해 튀르키에 파묵칼레로 향했다.
데이지 세계일주 버킷리스트 ④⑨ : 튀르키예 파묵칼레에 발 담그기
튀르키예어로 '솜의 성'을 뜻하는 파묵칼레는 석회암 지형으로 인해 솜처럼 보인 데서 유래했다. 지하 온천수에 있는 탄산칼슘이 지표로 분출한 게 식어 석회암이 형성된 것이다. 석회 침전물이 얇게 쌓이면서 계단처럼 석회층을 이루었다. 얕은 웅덩이 위의 온천수는 색다른 풍성을 연출했다. 튀르키예 남서부 데니즐리에 있어 고대 도시 유적과 함께 관광객은 파묵칼레를 찾는다.
한 달간의 튀르키예 여행에서 중반부터 대학 산악부 선배였던 제아 언니와 튀르키예 여행을 했다.
우린 안탈리아부터 히치하이킹으로 이스탄불에 가는 계획을 세웠지만, 지지부진한 속도로 겨우 페티예에 도착했다. 약 300km 주행이 남은 상황에서 우리는 피곤이 극에 달했다.
"언니, 히치하이킹으로 파묵칼레에 도착하면 맨 정신으로 파묵칼레를 맞이하지 못할 거 같아."
나는 잔뜩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도 고개를 적극 끄덕였다.
"그래도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갈까?"
20kg의 배낭을 메고 3km 거리의 버스정류장을 걸어갔다. 페티예를 강타한 무더위에 땀은 쉴 새 없이 흘렀다. 어느새 말이 없어진 순간, 힘든 티 없이 묵묵히 걸어갔다. 나는 정적을 깨며 말했다.
"무거운 배낭으로 40분을 걸으면 좋은 점이 있어."
"뭔데?"
"내 배낭이 쓸데없이 무겁다는 것을 깨닫고 무언가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각인시켜 주잖아."
"(웃음) 맞아. 그리고 가는 길목마다 예쁜 거리를 볼 수 있으니 좋네."
땡볕 아래에서 20kg 배낭을 멘 채 40분을 걷고 있어도 우린 함께한다는 사실로 서로에게 힘을 줬다. 뻘뻘 흘린 땀을 닦으며 정류장에 도착했다.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지난 모든 피로에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버스 출발까지 남은 시간에 근처 마트에서 갓 나온 빵과 튀르키예 유제품 음료인 아이린을 샀다. 빵 위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기는 해방감의 촉매제가 됐다. 우린 무거운 배낭에서 벗어난 자유를 아이린과 빵으로 축하했다.
"맛있고, 따뜻하고, 달달하며, 맛있다. 헤헤.. 방금 40분간의 여정에서 고생한 우리에게 치얼스!(건배!)"
히치하이킹 여정을 변경하고 오른 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편안함을 느끼니 졸음이 밀려왔다. 곧바로 눈을 붙였다 문득 일어나니 더위가 버스 안을 찔렀다.
"우리, 히치하이킹했으면 죽을 뻔했다."
뜨겁게 강렬하는 태양 아래, 아스팔트 위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상상만 해도 피로가 다시 몰려오는 듯했다. 버스 여정을 선택한 과거를 칭찬하며 버스 창가를 바라봤다. 미디어에서만 보던 하얀 석회암 언덕이 보였다. 희미한 흰색 벽이 선명하게 보이면서 파묵칼레가 가까워졌다. 하얀 천을 덮은 듯한 언덕은 햇빛에 반사되어 더 눈부시게 빛났다. 우리는 버스 회사에 짐을 맡긴 채, 수영복을 갈아입고 만발의 준비를 마쳤다.
'버킷리스트로 꿈꿨던 그 순간이라니!'
솜구름 같은 지형 위에 내 발을 올렸다. 발바닥에 석회질 가루 촉감이 느껴지니 파묵칼레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파묵칼레에 왔다는 걸 되뇌었다. 태양이 직사광선으로 내리쬐는 무더위에서 정신을 붙잡았다. 계속해 현실을 되뇌어도 스스로 믿기지 않았다. 나는 석회가루가 휘날리며 발을 감싸는 촉감으로만 실감했다.
파묵칼레에 오니 흰색 페인트를 언덕 전체에 부어놓은 듯이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날카로운 햇빛에 석회층은 뜨겁게 하얀빛을 내뿜었다. 나는 반사된 빛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어슴푸레 치켜둔 눈과 헤벌레 올라간 입꼬리로 말했다.
"언니! 우리가 파묵칼레에 왔어!"
학창 시절, [여행지리] 과목에서 파묵칼레를 봤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십 대 소녀의 꿈이지만, 지금 사진에 와있구나!'
석회질로 이루어진 곳곳은 하얀 솜털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울컥했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하얀색의 석회 언덕이 말하는 듯했다. 미지근한 물은 웅덩이에 고여 부드럽게 피부에 닿았다. 하얀 바닥에 비추어 하늘, 연보라, 주홍빛으로 다양하게 산란했다. 그 옆으로 맑은 온천수가 흘렀다. 산란해 붉은색으로 변한 모습은 목욕탕 때가 낀 느낌도 들었지만, 그 조차 꿈이란 이름으로 아름다웠다.
발밑에 느껴지는 돌은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푸른 하늘 아래 하얀 석회와 주홍빛 온천수 장면이 펼쳐졌다. 이미 파묵칼레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수영을 하고, 발을 담고 있었다. 파묵칼레 풍경에 사람들 웃음솔리가 가득했다. 파묵칼레 언덕 꼭대기에서 자연의 층층이 쌓인 석회석 음미했다.
"파묵칼레에 오기 전, 실망했다는 후기를 수없이 봐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래서일까 파묵칼레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수없이 붐비는 관광객들 사이로 파묵칼레 곳곳을 구경했다. 우리는 한참 구경하다 온천수에 몸을 담그며 더위를 풀었다. 조금씩 지는 어스름에서 분홍빛을 머금은 하늘과 파묵칼레는 여전히 하얗게 빛났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고 나니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 유적이 보였다. 수천 년 동안 여러 문명과 제국이 지나간 고대 도시는 파손된 돌멩이에서부터 과거로부터 회귀한 듯했다. 그리스어로 '신성한 도시'를 의미하는 히에라폴리스는 지열 온천수를 찾아온 고대인들로부터 치유의 도시로 알려졌다. 로마 제국 시대에 번성해 초기 기독교 시대까지 중요 도시로 기능했다. 언덕 경사면은 로마식 원형 극장이 거대하게 자리했다. 우리는 바위에 앉아 아나톨리아 언덕 너머로 펼쳐진 고대 시대를 상상했다. 뉘엿 지는 햇빛은 주홍빛으로 고대 도시를 물들였다.
"우린 과거부터 한반도 역사를 갖고 있어 같은 민족의식이 있지만, 여기는 오스만 제국, 로마제국 등 다양한 제국 시절이 있다가, 지금의 튀르키예 민족이 차지하고 있다면, 과거 땅을 지배했던 그 사람들은 땅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러게, 사람들이 로마시대의 유적을 자신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린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며 내뱉으면 증발할 질문을 나눴다. 뜨거운 태양이 지나가고 찾아온 산들바람에 가을 냄새가 풍겼다. 나는 언니와 노래를 불렀다. 유적지 사이에 있는 억새는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듯 흩날렸다. 붉게 물든 고대 도시를 바라보며 순간을 사랑했다.
"언니, 왜인지 모르겠지만, 파묵칼레는 내 오랜 꿈이었어. 내 꿈의 한가운데를 언니와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참 기뻐"
원형 극장에서 있던 공연까지 보고 돌아가는 길, 어두워진 파묵칼레 모습만이 남았다. 관광객이 빠진 뒤 차분해진 공기는 파묵칼레의 고요함을 더했다. 햇살 아래서 하얗게 빛난 석회층은 인공조명에 은은하게 형광빛으로 빛났다. 솜털 같던 석회 언덕이 눈으로 변해 마치 북극에 온 느낌이었다. 하얀색의 석회석은 북극의 빙하이며 원형극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빙하 위 오로라였다. 통행을 위해 설치된 인공조명조차 석회층에 닿아 은은하게 언덕을 비췄다. 흐르는 온천수는 달빛에 물결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머물러있는 온천수는 호수와 같았다. 호수가 밤하늘을 반사해 거울로 변한 듯했다. 불빛들은 빙하를 탐험하러 온 연구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낮의 솜털같이 선명한 흰색 빛을 내뿜던 파묵칼레는 밤이 되어 눈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볼거리도 많고 아름다운 곳이었던 파묵칼레.
무엇보다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던 제아언니 덕분에 이 순간이 더욱 아름답게 기억될 것을 확신했다.
사실 아직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다!
"제아언니, 그래서 우리 오늘 어디서 자지?"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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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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