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에 회사에서 잘린 건 알고 보니 행운이었습니다

4장. 행운도 알아보는 자에게 먼저 갑니다 (10편)

by 니나

“남들은 출근하고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에 자기는 다른 데를 돌아다닌다는 게 어색하지 않아?” 남자친구가 물어보았다.

“아니, 전혀.” 내가 대답했다.

시간개념, 요일 개념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이제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지금 주어진 이 특별한 시간을 쓰는 데에 아쉬움이나 부끄러움은 없는지를 물어보는 이야기다. 그래, 나는 그런 걱정, 아쉬움, 부끄러움이 이상하리만큼 없다.


친구 S가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사회가 많이 바뀌고 옛날과 같지 않아서, 이제는 우리가 20대에 배운 거로 40대까지 돈을 벌고, 그리고 다시 40대에 배운 거로 60대까지 돈 벌고, 다시 60대에 뭔가 다시 배워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게 아닐까?” 2021년 기준 기대수명이 평균 83.6세이고, 우리 외할머니는 96세까지 사셨고, 이제는 백세시대라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 안정적인 회사를 말 그대로 박차고 나온 친구를 보며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마구 퍼부었던 나였기에 단박에 그 말에 동의하는 제스쳐를 보이긴 어려웠지만 속으론 매우 동의했다. 변화가 빠른 IT업계라 체감 정년 나이는 법정 정년 퇴임 나이인 60세보다 훨씬 낮았고*, 직장 내 유리천장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와중이라, 친구의 말은 매우 일리 있었다. 내 주변의 직장인 여자친구, 언니 들을 보면 일부는 죽어라 일해서 정말 드문 여성 임원 라인을 타고 있고, 많은 경우는 지금의 직장 외 다른 직업을 가지기 위한 자기 계발과 네트워킹에 열심이다. 그리고 일부는 새로운 사업이나 일을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우리가 언제까지 지금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라는 말이 자주 튀어나왔었다. 사회생활 하며 연차와 직급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내적 친밀감이 강해지면서 속으로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어졌다.


통계청에 의하면 1985년 기대수명이 남자는 64.6세, 여자는 73.2세였다. 당시에는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면 정년 퇴임 (60세) 도 가능했으니,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거의 평생을 일할 수 있었고, 퇴직하여 쉼의 시간을 대략 5~10여년 가지다가 생을 정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회사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배운 것 한가지로 평생 먹고 살아가는 게 가능했던 시기다. 당시 경제 성장률이 7~14% 정도로 지금의 2~4%**에 비하면 매우 높았으니 지금처럼 취업이 어렵다거나, 회사에 경영 위기가 닥친다거나 하는 불안정성이 높지는 않았던 시기였다. 대충 40년 전의 옛날이야기긴 하다. 문제는 그 옛날과 같은 패턴으로 우리는 20대에 배웠던 것을 평생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아직도 한다는 데에 있다. 혹 착각하지 않았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회사 일에 치이거나 바쁘거나 번아웃으로 지쳐서, 미래의 불안정성을 준비할 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거나,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데에 있다.


나도 그랬다. 불안했지만 막연했고, 뭔가를 해야했지만 답을 못 찾았었다. 안정적인 월급과 좋은 근무 환경을 가진,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회사에 다닌다는 안정된 현재는 미래를 외면하게 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렀고, 변화를 추구하고 싶어도 지금 가진 것을 내려놓지는 못하게 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할 생각을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은 연봉, 처우, 환경인지를 따지게 되었고, 그 안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당장 3년 5년이 아니라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그려 나가야 할지에 대해 성찰하기는 어려웠다. 불안감을 불식시키고자 회사에 충성하는 좋은 근로자가 되어갔다. 일을 점점 늘렸고, 지쳤고, 결과물은 만족스럽지 않았고, 즐겁지 않았다. 미래를 과도하게 염려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현재를 즐기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나는 회사에서 잘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못 끊어낸 미련을 회사가 대신 끊어준 셈이다. 그냥 끊은 게 아니라 쉬라고 Garden leave (가든 리브)도 챙겨주고, 퇴직 위로금도 IRP 계좌에 넣어줬다. 직장생활 20년에 이런 이벤트라니 하필 숫자도 너무 좋았다. 10년이나 15년이었으면 지금처럼 쉬며 딴짓하며 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에는 좀 아쉬웠을 것이고, 25~30년이었으면 좀 늦었다 싶었을 듯하다. (상대적이라는 것이지 늦은 것은 절대 아니다) 20년이란 숫자는 친구 S가 이야기한 그 주기랑도 딱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그때의 참담했던 시간을 지나니, 앞으로 일하면서 무슨 일이 생겨도 다 의연하게 대처하고 넘길 수 있는 배짱과 대담함도 생겼다. 노동법도 조금 더 잘 알게 되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내가 매일 글을 쓰고 있고, 또한 글쓰기를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내 감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못했었다. 좋지 않은 감정은 그저 화나 짜증 정도로 치부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기 힘들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었다. 좋은 감정은 또 좋은 데로 두루뭉술했고, 왜 좋은지 어떻게 계속 좋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쓰며 나를 그 글에 남기니, 나는 다른 내가 되어 나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내 감정에 더 충실하고 솔직해질 수 있었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 감정에서 빠져나와 제어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상황이 될지, 더 나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게 되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회사를 원망하고 위축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나에게 그런 참담하고 암담했던 시간이 언제 있었느냐 싶은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한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타로를 봐주신 S 선생님의 말씀처럼 내 인생의 새로운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가 하필 사십 대에 나를 잘라준 바람에 나는 어떤 삶을 살지를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다. 비록 예전보다 금전적으로 부족하고, 남들의 눈에 나는 어리석고 불안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다른 이들이 회사에 몸을 바치는 동안 나는 나를 탐구하고 나에게 몰입했으니까. 내가 만들고 내 발에 채웠던 족쇄, 가족의 기대나 주변의 시선 혹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으로 포장되어있었던 그것들을 풀어냈으니까. 그렇다고 아직 미래를 완벽하게 계획하거나 결정한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욕심이 더 생기고 있고,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있다. 그래서 고민은 늘 많고, 동시에 결국 현명한 선택을 할 거라는 자신도 있다.


헬렌 켈러는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만 계속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있는 다른 문을 미처 보지 못한다’라고 했다. 나의 한쪽 문은 2022년 11월에 닫혔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면서 열려있는 다른 문을 찾았다. 아니, 다른 문을 열기 위해 원래 문을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닫았어야 했다. 용기 내지 못하고 망설이고 안주하는 동안 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박연준 시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 남들을 따라서 하는 노력은 나를 지웠었다. 이러한 노력은 인생을 무겁게 만들었고, 의무감으로 살게 하고 삶을 버텨야 할 시간으로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이제야 이야기하지만 먼저 닫을 용기를 내지 못한 나를 대신해 문을 닫아준 회사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사십 대에 회사에서 잘린 건 진정 나에게 행운이었다.



* 직장인 체감 정년퇴직 연령 ‘만 51.7세’ (출처 : 잡코리아, 알바몬 조사)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10667

** 경제 성장률 : 1983년 13.4%, 1984년 10.6%, 1985년 7.8%, 1986년 11.3%, 1987년 12.7% / 2021년 4.1%, 2022년 2.6% (출처 : 한국은행「국민소득」, 국내총생산 및 경제성장률 (GDP) ) 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736

*** 서은국, <행복의 기원>

**** 박연준, <고요한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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